인생관

청백의 유래

기산(箕山) 2007. 11. 9. 02:57


 

“특산품이라도 가져오는 게 낫지 않았나?”라는 물음이 나올 법도 했다.

지방의 벼슬을 지내는 자로서 수도에 올라올 때면

금은보화는 아닐지라도 특산품 한둘 정도는 가지고 와서

중앙의 고관들에게 상납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힐문.

우겸(于謙)이라는 사람 정말 대단하다.

친구의 이런 물음에 그저 웃으며

“내 두 소매에는 그저 깨끗한 바람뿐(兩袖淸風)”이라고 대답한다.

때는 명(明)대 영종(英宗) 시기다.

당시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세도를 부리던

왕진이라는 환관에게는 온갖 뇌물이 잇따랐다.

수도에 올라온 지방관이 왕진을 만나는 데만

은 100냥이 필요했을 정도니 말이다.

지금의 산시(山西)를 총괄하던 지방 수장이었던 우겸이

수도인 베이징에 올라온 뒤 친구가

“왕진에게 잘 보이라”는 충고를 하자 보인 반응이다.

석회를 두고 읊은 시 한 수에서는 그의 이런 면모가 잘 드러난다.

 “천 번 만 번 두드려서야 깊은 산 속에서 나오니/

뜨거운 불에 태워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뼈와 살이 뭉개져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니/

사람 사는 세상에 청백함을 남기기 위함이리라.

(千錘萬擊出深山, 烈火焚燒若等閑, 粉身碎骨渾不 要留靑白在人間)”.

석회라는 물체를 두고 지은 일종의 영물시(詠物詩)다.

‘석회음(石灰吟)’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시에서는

석회가 캐어지는 과정과 제련을 거쳐 석재로 만들어지는 모습이 그려졌다.

우겸은 공무를 수행하며 수많은 난관에 닥쳐 자신의 모든 것이 다 깨어지고

없어지더라도 늘 깨끗함을 유지하겠다는 일종의 맹세를 시에 담았다.

본문에는 석회석의 색깔에 빗대 청백(靑白)이라는 글자가 쓰였지만

이는 후대에 오면서 청아하고 깨끗함을 나타내는 청백(淸白)으로 해석된다.

그는 시에서 보여준 자신의 뜻대로 깨끗함과 공정함으로 일관했다.

후에 모함에 빠져 결국 억울한 죽음을 맞았지만

지방관으로서의 인정(仁政)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기개로

중국 역사에서 흔치 않은 청백의 관리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 신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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