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관

깨달음은 이미 현존한다...

기산(箕山) 2007. 8. 23. 03:17

                      

 

한때 백장이 이렇게 말했다.
"'본래 청정하다'거나 '본래 해탈하였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이대로가 부처이며 선도(禪道)라고 하는자들은 인과율을 부정하는 외도(外道)에 속한다

원율사(源律師)라는 이가 와서 대주(大珠)에게 물었다.
"화상께서도 도를 닦는데 공(功)을 들이십니까?"
대주가 말했다.
"그렇다. 공을 들인다."
"어떻게 공을 들이십니까?"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밥을 먹을 때에도 백 가지 분별을 일으키고,

잠을 잘 때에도 숱한 망상을 일으킨다. 이것이 그들과 내가 다른 점이다."
이에 율사가 입을 다물었다.

유식(唯識)을 강의하는 도광(道光)이라는 강사가 대주(大珠)에게 물었다.
"선사께서는 어떤 마음을 써서 도(道)를 닦으십니까?"
대주가 대답했다.
"노승(老僧)에게는 쓸 마음도 없고, 닦을 도(道)도 없다."
"쓸 마음도 없고 닦을 도(道)도 없다면,

왜 날마다 대중을 모아놓고 선을 배우고 도를 닦으라 하십니까?"
"노승에게는 송곳 꽂을 땅도 없는데 어디에 대중을 모았다 하는가?"
도광이 소리쳤다.
"선사께서는 왜 사람을 앞에 놓고 거짓말을 하십니까?"
"노승은 사람들에게 권장할 혀도 없는데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는가?"
"저는 선사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주가 말했다.
"이 노승도 모른다."

마니샤, 이 강의 시리즈는

[백장: 바쇼의 하이꾸와 함께 하는 선의 최고봉]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백장은 표현력이 풍부한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을 어떻게 불가지(不可知)의 차원으로 인도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바쇼는 산문(散文)을 쓰지 않았다. 바쇼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 중의 한 명이다.

그러나 그의 위대성은 시(詩)에 있지 않다.

시에 관해서라면 그보다 훨씬 더 훌륭한 시인들이 많다.

그의 시는 단순히 특정한 형식에 맞춰 미사여구를 배열한 것이 아니다.

그의 시는 체험에서 나온다. 이것이 그의 위대함이다.

나는 이 강의에서 백장과 바쇼를 결합시켜 놓았다.

그 이유는 백장이 시를 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접근 방식은 매우 산문적이고 직접적이다.

그런데 하이꾸는 산문에 빠져있는 요소를 보완해 준다.

바쇼는 그림을 그리듯이 회화적(繪畵的)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했다.

그의 체험은 시(詩)라기보다는 그림에 가깝다.

 
그는 산문으로 불가능한 것이 시로써는 가능하다고 보았다. 나는 그에게 공감한다.

시는 더 여성적이고 섬세하게, 더 우아한 방식으로 가슴 속 깊이 스며든다.

산문은 직접 머리로 치고 들어가 논리적 이성과 관련을 맺는다.

그러나 시는 다른 뿌리, 다른 경로를 갖고 있다.

시에 관한 한 우리는 합리성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시를 통해 마음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무엇인가 자극 받는다. 시는 논리적인 진술이 아니다.

시는 실존의 언어다. 바쇼는 자신이 직접 본 것을 말로 옮겨 놓으려고 했을 뿐이다.

이것이 내가 두 위대한 스승을 같이 언급하는 이유다.

둘 다 히말라야의 봉우리처럼 우뚝 서 있다. 이 두 사람이 어울려 절묘한 조화를 이룰 것이다.

산문이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을 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산문에는 많은 것이 빠져 있다.

시는 산문이 빠뜨리고 있는 것을 담을 수 있다.

왜냐하면 시는 논리나 문법, 형식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시에는 산문이 가질 수 없는 자유가 있다.

따라서 산문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시는 잘 표현해 낸다.

대주(大珠), 즉 '큰 진주'라는 말은 두 사람 모두에게 적용된다.

두 사람 모두 참으로 아름다운 선사들이다.

백장의 경문과 바쇼의 하이꾸로 들어가기 전에......

어제는 백장의 약력을 소개했으니, 오늘은 바쇼에 대해 알아보자.

일본의 하이꾸 시인(詩人)인 바쇼는 1644년, 우에노 성(城)의 영주를 모시는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그는 귀족 가문의 시동(侍童)이 되어 그 집의 장남과 함께 공부했다.

여러 기예 중에서도 그들은 특히 시작법(詩作法)을 배웠다.
주인이 죽자, 그는 지금의 도꾜인 에도(江戶)에 가서 키진(Kigin)의 지도 아래 시(詩)를 배웠다.
그 다음에 그는 부초(Buccho) 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대시인(大詩人)으로서 명성이 자자해지자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는 평생을 여행자로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했으며, 이런 삶의 방식은 그가 깊은 친밀감을

느끼는 자연을 관찰하고 시를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한번은 그가 이렇게 썼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들은 자연과 하나다.

그런 마음이 보는 것은 무엇이든지 꽃이며, 그런 마음이 꿈꾸는 것은 무엇이든지 달(月)이다.

꽃이 아닌 다른 것을 보는 것은 속된 마음이며,

달이 아닌 다른 것을 꿈꾸는 것은 동물적인 마음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꽃과 달은 상징이다.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진정으로 고요한 마음은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

가장 진실한 것만 본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의 소유자는 오직 꽃과 달을 본다.

그와 같은 경지에서는 천하고 추한 것을 보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천하고 추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공(空)을 체험하지 못한 이 마음을 '속된 마음'이라고 부른다.

아름다운 정의(定義)다.

 

붓다의 마음은 도처에서 오로지 꽃만 본다.

붓다의 마음은 깜깜한 밤에도 달과 별 등 아름다운 모든 것들을 본다.

아침이건 저녁이건 상관없다. 무심(無心)은 가장 소중한 것들만 비춘다.

그런데 보통의 우리가 갖고 있는 마음은 가장 추한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이 마음은 속되다.

대주는 월주로 돌아가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칩거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약간 미친 것 처럼 보였다.

이 시기에 그는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이라는 경전을 썼다.
후에 이 책은 도둑맞았으며, 양쯔강 유역으로 흘러들어 마조가 보게 되었다.

이 책을 조심스럽게 읽어 본 마조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지금 월주에 큰 구슬(大珠)이 있는데,

그 광채가 영롱하고 자유자재하여 사방에 막히는 곳이 없다."

 

마니샤가 가져 온 경문을 보자.

한때 백장이 이렇게 말했다.
"'본래 청정하다'거나 '본래 해탈하였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이대로가 부처이며 선도(禪道)라고 하는 자들은 인과율을 부정하는 외도(外道)에 속한다."

이제,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수세기 동안 가장 논쟁적인 주제 중의 하나였다.

깨달음이 돌발적이라는 것은 깨달음에 아무 원인(cause)도 없음을 뜻한다.

인과율에 구애받지 않아야만 깨달음이 돌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만일 어떤 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먼저 그 원인이 생기고 난 다음에 깨달음이 따라올 것이다.

과학은 인과율(因果律)을 믿는다.

필수적인 원인을 제공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뒤따른다.

그러나 돈오(頓悟)라는 관점에서 보면 선(禪)은 인과율이라는 개념을 무시한다.

깨달음을 낳는 원인은 없다.


백장은 이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어떤 원인이나 인과율도 깨달음으로 이끌지 못한다.

그 이유는 깨달음이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인과 결과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결과는 나중에 오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어떤 원인의 결과가 아니다. 깨달음은 이미 여기에 있다.

이미 여기에 있는 것은 아무 원인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그대의 시선을 돌리기만 하면 된다.
시선을 돌리는 것은 원인이 아니다.

깨달음이 필요로 하는 것은 그대의 상기(想起)다 그것이 전부다. 상기하는 것은 원인이 아니다. 이미 여기에 있는 것, 이미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은 인과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과율은 예전에 없던 것을 생산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이미 현재에 존재한다. 아무 것도 보탤 필요가 없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깨어나서 보는 것이 전부다.

 

이 '봄(見)'은 인과율이 아니다. 이해하면 그 뿐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방법이나 방편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방편의 역할은 그대 안에 어떤 과정을 촉발시켜서 내면으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방편은 내면으로 눈을 돌리게 할 수는 있지만 깨달음을 생산해낼 수는 없다.

진지하고 절박한 열망으로 내면을 들여다보면 붓다는 이미 거기에 있다.

이 붓다는 수 천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노출시키면서 그대가 시선을 돌리기만 기다리고 있다.

 

모든 선사(禪師)들은 방편에 대해 말한다.

왜냐하면 그대에게 그대자신의 붓다, 그대 자신의 본질을 소개해줄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 안에 너무 깊이 숨어 있어서 객관화시킬 수 없다.

"보아라, 이것이 그대의 본질이다. 서로 인사를 나누어라."하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도 그대에게 그대 자신의 본질을 소개해줄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모든 방편은 거짓이며, 어떻게 해서든지 그대의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려는 스승의 필사적인 노력이다.

내면으로 시선을 돌린 다음에는 모든 일이 저절로 일어난다.


율사(Vinaya master)가......

비나야(Vinaya)는 불교의 모든 경전에 대한 총칭이다.

원율사(源律師)라는 이가 와서 대주(大珠)에게 물었다.
"화상께서도 도를 닦는데 공(功)을 들이십니까?"
대주가 말했다.
"그렇다. 공을 들인다."
"어떻게 공을 들이십니까?"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참으로 멋있고 아름다운 말이다. 하해(夏海)같은 의미가 들어 있다.

대주가 말했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대주는 말한다.
"나는 그저 자연적인 성품을 따른다.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자연적인 성품이 있을 뿐이다. 이 성품이 피곤하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다.

나는 거기에 끼여들지 않으며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원율사가 당연한 질문을 던진다.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밥을 때에 백 가지 분별을 일으키고, 잠을 잘 때에도 숱한 망상을 일으킨다.

이것이 그들과 내가 다른 점이다."

 

아주 분명한 차이점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붓다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똑같다. 붓다도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그대와 마찬가지다.

표면적으로는 아무 차이점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차이점은 내면은 있다.

붓다는 밥을 먹을 때 그저 먹는다. 그의 마음속에 다른 사념들이 떠다니지 않는다.

그의 관심, 그의 깨어있는 의식은 전적으로 현재의 먹는 행위에 몰입해 있다.

잠을 잘 때 그는 그저 잔다. 그는 꿈을 꾸지 않는다.

수천 가지 불안과 문제를 안고 여기 저기 배회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런 문제들이 없다. 잠잘 때 그는 그저 잔다.


현대의 정신분석학은 이런 이해에 도달해야 한다. 그들은 아직 이런 이해에 도전할 용기가 없다. 그들은 바쇼가 '속된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만 연구하고 있다.

붓다의 마음을 탐구하지 않는 한 그들이 내린 모든 결론, 그들의 학문 전체가 미완성으로

남게 될 것이다.

붓다의 마음을 탐구하는 것은 정신분석학 전체에 엄청난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왜냐하면 표면상으로 붓다는 그대와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핵심을 알 수 있다.

그대는 밥을 먹는 동안에도 수많은 잡념을 일으킨다.

잠자는 동안에는 머나 먼 땅에 대해 꿈꾸고 있다.
어쩌면 억눌린 욕망들에 대해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대는 어떤 여성과 사랑의 행위를 하면서도 그 여성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그대는 소피아 로렌(Sophia Loren)을 생각하고 있다.

그대만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와 사랑을 나누는 여성은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를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슬픈 일이다. 한 침대에 네 사람이 누워 있다. 이것이 속된 마음이다.

속된 마음은 이 순간에 있지 못하고 항상 다른 곳을 배회한다.

대주(大珠)는 깨달은 사람을 분명하게 구별했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그 밖의 어떤 것도 하지 말라. 언제나 이 순간에, 이 행위에 전념하라.

손을 들어올릴 때에는 그저 손을 들어올려라.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라.
앉을 때에는 그저 앉고, 걸을 때에는 그저 걸어라. 행동 하나하나에 완전히 전념해야 한다.

그러면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못한다.


이 간단한 이해만으로도 붓다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이해는 그대의 모든 의식을 한데 모아 화살처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살이 된 의식은 그대 삶의 근원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한다.

모든 방편은 그대의 의식을 화살로 만드는 장치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절박한 열망이 있을 때 이 화살은 과녁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한다.

그대는 이 과녁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것은 아주 짧은 여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거기에 이르는데 수백 만 번의 생애가 걸리는 것은

그들이 한치도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속된 마음은......

 

"잠을 잘 때에도 숱한 망상을 일으킨다. 이것이 그들과 내가 다른 점이다."
이에 율사가 입을 다물었다.

원율사는 학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내면의 세계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전적으로 외부의 개관적이고 철학적인 개념만 다루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어디에서 왔는지, 자신의 의식이 어디에서 일어났는지,

자기 존재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대주의 말에 그는 입을 닫았다.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깨달은 것은 아니다.

다만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스승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경전에 통달한 사람이다. 그러나 '먹을 때에는 먹고, 걸을 때에는 걷고, 앉을 때에는 앉는'

경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이것이 학자들의 문제다. 그들은 계속해서 참된 스승을 놓친다.

그들은 이해를 구하지만 경험이 아니라 오직 말을 이해하려고 한다.

 

 

                     김도화의 시 사랑방(☆^_^☆)  |  글쓴이 : 바다소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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