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유교를 이념으로 건국한 국가다. 왕실과 불교 그리고 권문세족이 뒤엉켜 부패한 고려를 뒤엎고 개국한 조선은 도덕률을 지향했다. 유학에 근거한 도덕은 군신간의 충(忠), 부자간의 효(孝), 부부간의 별(別)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것이 유교국가 조선을 떠받치고 있는 가공할 위력의 삼각편대다. 이른바 박저생(朴抵生) 사건이다. 아버지가 아들의 첩을 간음하고 그 아비가 죽자 아버지가 취했던 그 여자를 다시 아들이 첩으로 삼는 희대의 치정사건이 터진 것이다. 사건을 일으킨 문제의 당사자들은 원대복귀라고 변명하지만 삼강오륜을 따지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태종 12년 12월. 찬바람이 스산한 사헌부에 사건을 고변하는 부인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미가 아들을 고발한다는 것이 아닌가. 아비의 후처 즉 아들의 계모가 의붓아들을 고발한 것이다. 밑그림을 완성한 장령은 아들 박저생을 잡아들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를 기다렸습죠." 네 아비의 첩을 네가 간음한 것 이라는 사실을 네가 몰랐더냐?" 법리적으로 사무생유(死無生有) 즉, 죽은 자는 죄를 물을 수 없고 산자의 죄를 묻겠다는 뜻이다. 또한 효(孝)란 인륜도덕에 바탕을 둔 효가 가치가 있으며 수평관계가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건을 고발한 계모는 그 여자가 의붓아들의 첩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유산다툼을 하다가 의붓아들을 고발한 것이다. 문제의 여자를 잡아들였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심문에 응하는 파독(波獨)이 딴 나라에서 온 여자로 보였다. 배시시 웃는 모습이 푼수 같기도 했고 눈웃음을 흘리는 것으로 보아 요부 같기도 했다. 천박성에 백치미(白痴美)를 겸비한 파독은 아버지와 아들을 인륜과 도덕을 파괴하는 패륜의 늪으로 빠지게 한 장본인이었다. 사간원, 형조와 함께 임금에게 보고했다. 박침이 죽자 박저생이 다시 첩으로 삼았으니 부자가 공간(共奸)한 정상이 명백합니다. 고변자 곽씨는 규문(閨門)의 추한 것을 발설함으로써 그 남편의 죄악을 드러내게 하였고 파독은 아비와 아들의 첩이되기를 달게 여겨 거부하지 않았으니 일일이 율(律)에 의하여 논죄(論罪)하소서." - <태종실록> - 이 사건을 고발한 곽씨도 죄가 된다는 법리해석이다. 또한 이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파독이 피해자로서 고발했으면 죄가 없으나 달게 여겼으니 죄가 되므로 별개의 사건으로 다뤄 엄히 다스리자는 것이다. 이 계집이 실지로 고하지 아니하였다. 그 아비가 죽은 뒤에 박저생이 재간(再奸)하였어도 아비의 연고 때문에 그 아들을 고하지 아니하였다. 이제 직접 아비의 첩을 간음한 것으로 여겨 참(斬)함은 그것이 '죄가 의심나거든 가볍게 벌을 주라'는 뜻에 있어 어긋난다. 다시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 <태종실록> - 순금사겸판사(巡禁司兼判事) 박은이 사형의 삼복법(三覆法)을 청하니 그대로 따른 것이다. 삼복법이란 오늘날의 삼심제로서 박은이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사죄(死罪)에는 삼복(三覆)한다고 하였으나 형조와 순금사에서 시행하지 않고 있으니 육전(六典)을 따르도록 하소서'라고 주청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삼복법이 시행되었다. 받아야 하며 인륜(人倫)의 대변(大變)을 용서함은 옳지 못합니다." 파독은 장 1백 대에 처하여 외방으로 내치라." 죄를 면할 만합니다." 박저생이 그동안 사헌부와 형조에 갖다 바친 뇌물이 얼마인데 죄를 주냐는 항변이었다. 조사를 담당했던 사헌부와 형조가 발칵 뒤집혔다. 폭로에 수사기관이 어수선한 사이 박저생이 순금사 옥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뒤가 캥긴 순금사에서 놓아준 것인지 탈옥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삼성(三省)에서 형의 죄를 오결(誤決)했다고 항의하고 나섰다. 삼성에서는 박강생이 말을 꾸며 해당 관서를 능욕하였다 하여 아전을 보내어 두 사람과 곽씨의 집을 수직(守直)하게 하였다. 사건은 점점 꼬여갔다. 이름을 바꾸어 박의(朴義)라는 사람으로 행세하던 박저생이 전 언양감무(彦陽監務) 장효례와 재산을 다투다 신분이 드러난 것이다. 밀양 지군사(知郡事) 우균에게 체포된 박저생이 한양으로 압송되어 순군옥에 다시 투옥되었다. 이미 속(贖)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죄는 사면되었다는 항변이다. 사건을 다루었던 사헌부와 형조에 불똥이 튀었다. 대사헌(大司憲) 허응이 연산(連山)으로 귀양 가고 집의(執義) 이맹균은 원주에, 장령 이명덕은 곡산으로 지평 허항은 진주로 유배당했다. 직계상관들이 줄줄이 귀양 간 것에 따른 보복성 고문이었다. 여기에서 또 문제가 터졌다. 곽씨의 아들 박눌생이 신문고(申聞鼓)를 쳐서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나선 것이다. 김질은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나가게 되고 이승직은 지의주사(知宜州事)로 내보냈다. 대사헌 한상경이 아뢰었다. 하물며 곽씨의 죄는 비록 실지의 율(律)에 의거한다 하더라도 이죄(二罪) 이하에 해당되며 또한 그들의 고문은 사정(私情)을 두고 행하였으니 이는 관리가 법을 받드는 뜻이 아닙니다." 삼성에서 박저생의 죄를 치죄(治罪)하고자 하였으나 유지를 거쳤으므로 대벽(大辟)을 면하고 울주에 부처(付處)되었다. 귀양살이하는 몸이 울주에 잠자코 있으면 되련만 울주에서 탈출한 박저생이 김화현에 스며들어 도망생활을 하던 중 그 현(縣) 사람의 토지를 빼앗으려다 체포되어 신분이 탄로 났다. 율(律)에 의하여 시행(施行)하되 무부(無父)·내란(內亂)의 죄로 다루소서." 한양으로 압송된 박저생은 순군옥에 투옥되었다. 이튿날 박저생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자살이라고 공식 발표되었지만 사실과 진실은 박저생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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