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9일 (목) 07:17 스포츠서울
한번 빠지면 빠져 나오기 힘든 '드라마 중독'
24시간 언제든지 드라마 시청이 가능한 세상이 됐다.
지상파 본 방송을 놓칠 것을 우려해 하던 일을 멈추고 텔레비전 앞에 앉던 시절은
이미 까마득하다.
손쉽게 마우스로 클릭만 하면 모니터로도 시청이 가능하다.
한 케이블 채널(이하 케이블)에선 수도꼭지 시청률을 기록한 흥행작 <첫사랑>(1996년)이
방송될 만큼 현재형, 완료형 등 수많은 드라마들이 전파를 타고 있다.
그래서일까. 드라마 중독에 대한 사회적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관련 전문가들은 드라마 중독을 사회현상으로 바라본다.
주변의 여건이 드라마 중독으로 가는 KTX를 타기 십상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드라마에 푹 빠진 사람들을 마니아와 중독으로, 딱 잘라 구분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했다.
드라마 중독이라고 딱 결론짓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섹스, 도박, 성형, 알코올, 니코틴, 마약, 쇼핑, 절도, 주식, 인터넷…. 중독(中毒)의 대상은
수없이 많다.
중독증이 걸린 사람들은 나중에 후회할망정 그 순간은 외면하지 못한다.
문제는 당사자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사성어 중 과유불급(過猶不及)이 있다.
지나치면 오히려 해를 끼칠 염려가 있다는 뜻이다.
24시간 언제든 시청 '나도 모르게 늪으로 푹~'
불륜소재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내 남자의 여자>의 24부작이 지난 7일과 8일,
주말 이틀 동안 시청자들을 찾았다.
국내 드라마 전편이 종영 직후 논스톱으로 방영되기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케이블 채널인 SBS드라마플러스는 “파격적인 주말 연속 편성으로,
다음 회를 보기 위해 일주일간 기다려야 했던 시청자들의 갈증을 한 번에 해소해 줄 것이다.
시청자들의 성원에 이 같은 파격 편성을 기획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같은 파격 편성이 반드시 좋지만은 않은 법.
지난 8일 어린 자녀(4살, 2살)들을 데리고 오랜만의 외출을 계획했던 김일동(34·서울 강서구
등촌동)씨는 끝내 바깥에 나가지 못했다.
동갑내기 부인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사연인즉 텔레비전에서 보고 싶은 드라마가 종일 방송하니 다음에 나가자고 했다는 것.
결국 김씨는 외출은커녕 아이들과 하루 종일 씨름하며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침식사로 밥을 먹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점심, 저녁은 피자, 냉면으로 때웠다.
참다못한 그가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한마디 했다가 오히려 잔소리 폭탄을 맞아야 했다.
김씨의 부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주말에 아이 좀 보는 게 그렇게 불만이야. 매번 그런 것도 아닌데 남자가 왜 그래 속 좁게.
매일 애들 보는 나는 어떨 것 같아.”
김씨는 자신의 부인이 드라마 중독이라고 단언했다.
오래 전에 했던, 모든 내용을 알고 있는 드라마도 케이블에서 전파를 타면 꼭 본다는 것이다.
그는 결코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못 봤던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봤던 것을 왜 보느냐는 것이 그의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함이다.
이와 관련 한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김씨의 부인을) 직접 만나 상당하지 못해 뭐라 답변하기
곤란하다”면서도 “드라마 중독이 아닌 <내 남자의 여자>의 중독일 수도 있다”도 밝혔다.
직장인 신용건씨(가명·41·서울 구로구 고척동)는 스스로를 ‘드라마 마니아’라고 부른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하는 중독과는 다르다고 했다.
신씨는 일주일 동안 방송3사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들을 거의 빠짐없이 본다.
이에 대해 “그게 가능하냐”는 물음에 그는 “예전과 달리 케이블의 재방영이나 방송사의 인터넷
보기가 있어 오케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인터넷상에서 유료로 드라마를 보는 방송사의 드라마는 가능한 텔레비전으로 보고,
무료 제공되는 드라마는 인터넷으로 시청한다”고 밝혔다.
현재 방송3사에서 방송 중인 안방극장은 20개가 넘는다.
신씨는 주부들이 주로 시청하는 것으로 유명한 아침 드라마를 비롯해 모든 드라마의 줄거리를
꿰뚫고 있다.
드라마를 열렬히 보다 보니 웬만한 드라마 스토리의 전개는 훤히 내다본다.
다음 장면은 어떻게 될 것이라는 짐작이 척척 들어맞는다.
때때로 부인과 리모콘 전쟁을 벌이다 “당신이 남자지 여자냐, 남자가 청승맞게 웬 드라마를
보느냐”고 타박 받으면 처음엔 멋쩍어서 피했으나 이제는 당당히 맞선다.
“유일한 낙이자 취미생활”이라고.
그는 “인터넷으로라도 보아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했다.
결국 광적인 드라마 시청 문제로 부인과 적잖이 부부싸움을 했다.
신씨의 드라마 사랑은 가정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회사에서도 이어진다. 물론 인터넷이 가능한 이유다. 내부 규율이 엄격하지 않다 보니 대놓고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점심식사 시간은 그에게 중요한 시간. 텔레비전을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식당만 찾아간다.
이 때문에 주변에선 그를 마니아가 아닌 ‘드라마 중독자’로 본다.
물론 본인은 마니아일 뿐이라고 항변한다.
윤영연 할머니(66) 역시 드라마 없이는 못사는 경우다.
하루 종일 TV를 켜놓는 것은 물론 대부분이 드라마를 시청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
최근엔 오래 전의 드라마 재방송을 보는 재미에 빠져있다.
요즘 케이블에서 옛날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드라마 줄거리를 알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그저 틀어놓기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다른 장르의 프로그램은 보기 싫다고 한다.
윤 할머니는 20살 되던 해에 결혼했다.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취미생활은 해본 적이 없다.
취미생활이라면 안방극장 시청이 유일했다.
다섯 살은 연상인 할아버지도 할머니의 유일한 낙을 인정, 리모컨 싸움에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말하지 않는다.
한편 드라마 중독은 대개 집에서 살림하는 가정주부들에게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 전문의는 주부가 드라마에 빠지게 되면 가사 일을 소홀히 하거나 가족과의 대화단절로
인한 갈등이 생기고, 심각한 경우에는 드라마 속의 주인공을 지나치게 동일시하여 주인공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며 생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지적한다.
김진세 고려제일신경정신과 원장은 “드라마 중독은 공식적으로 질병으로 분류되지는 않으나,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과 상당히 밀착해 있다”고 말했다.
사실 공중파 방송3사에 케이블까지 드라마에 쏟는 열정이 대단하다.
톱스타 출연료, 해외 로케이션 등에 거액의 돈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다.
광고매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볼거리를 풍성하게 만들며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드라마를 과도하게 보는 것 자체가 문제는 되지 않는다.
드라마는 쉽게 사람을 이완시키고 공동의 관심사와 이야기 거리를 제공한다는 좋은 기능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김 원장 역시 “드라마가 나쁜 면만 갖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안방극장을 통해 정보나 지식을 얻을 수 있고, 동시에 이완과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 있다는 것.
더불어 대리만족이라는 것도 자기통제만 잘 된다면 감정을 순화하는 기능이 있어 긍정적인
면이 강하다고 밝혔다.
드라마 시청에 대한 폐해의 목소리도 높다.
여성의 사치, 남성의 폭력, 이혼 불륜 조장 등 본인을 환상 속에 가두어 황폐하게 만들고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드라마 중독은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사태의 심각성이 드러난다.
김 원장이 내린 드라마 중독의 정의는 이렇다.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드라마 내용에 집착하는 것이 일상의 최우선이고 일상에서 가장 많은
자극과 이완감을 주는 상태로, 이로 인해 일상생활에 지장을 준다.”
드라마 중독 증상을 나타내는 사람들 대부분의 특징은 단순하다.
드라마를 방영하는 시간에는 바깥일을 피하고 만약 드라마를 못 보게 되면 극심한 불안에
시달린다.
상태가 심할 경우에는 드라마 내용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망상에 빠져 살게 되는
경우가 있다.
또 드라마 내용이나 주인공에 대한 것들이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거나,
드라마에 관한 것이 아닌 대화에서는 불안감이나 이질감을 느끼기 십상이다.
이는 곧 대인관계 단절로 나타난다.
김 원장이 밝히는 드라마 중독 의심은 자신의 드라마 시청시간부터 따져봐야 한다.
여가시간을 대부분 드라마 보는 일로 허비한다면 위험징후라는 것.
게다가 다른 활동으로 여가를 보내기가 불안하거나 드라마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중독일 가능성이 높다.
또 일상의 대화중에 드라마 이야기를 꼭 하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린다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드라마를 보기 위해 일상의 일들인 식사, 수면 등을 거르는 일이 잦은 경우 드라마를 하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해야 하는 경우나 드라마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 불안감이 느껴진다.
김 원장은 “의학적으로 드라마 중독이란 말은 없다”면서도 “그러나 드라마에 집착해서 일상에
지장을 둔다면 한번쯤 의심해 봐도 좋을 듯하다”고 밝혔다.
이어 “본인이나 주변에서 드라마 중독이 심하다고 판단했을 경우엔 드라마 시청을
가능한 피하거나 병원을 찾아 상담을 받아보는 게 좋다”고 했다.
아울러 “24시간 드라마 시청이 가능한 현재의 상황이 드라마 중독자 양산에 영향을 미칠
개연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일요시사 성강현·현우성 기자ㅣ스포츠서울닷컴 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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