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관

Besame Mucho / Dalida

기산(箕山) 2016. 10. 30. 17:26

Besame Mucho / Dalida Besame besame mucho 내게 키스해 줘요 더 많이 키스해 줘요 Cette chanson d'autrefois je la chante pour toi 이 오래된 노래를 너를 위해 부르네 Besame besame mucho 내게 키스해 줘요 더 많이 키스해 줘요 Comme une histoire d'amour qui ne finirait pas 끝나지 않을 사랑의 이야기처럼 On l'a chantée dans les rues sous des ciels 우리 이 노래를 알지 못하는 하늘아래 길거리에서 Inconnus et dans toute la France 프랑스 어디에서든 불렀네 On la croyait oubliée et pour mieux nous 잊은줄만 알았던 그 노래 우리 더 사랑하기 위해 Aimer voilà qu'elle recommence 그 노래가 다시 시작되네 Besame besame mucho 내게 키스해 줘요 더 많이 키스해 줘요 Si dans un autre pays ça veut dire embrasses-moi 어느 나라에선가 나를 안아달라는 뜻이라면 Besame besame mucho 내게 키스해 줘요 더 많이 키스해 줘요 Toute ma vie je voudrais la chanter avec toi 평생동안 이 노래를 너를 위해 부르고 싶네 On ne demande à l'amour ni serment de 우리 사랑하기에 평생동안의 언약이나 Toujours ni décor fantastique 완벽한 육신을 바라지 않네 Pour nous aimer il nous faut simplement quelques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선 단지 음악과 함께하는 Mots qui vont sur la musique 몇몇의 말이 필요할 뿐 Besame besame mucho 내게 키스해 줘요 더 많이 키스해 줘요 Si dans un autre pays ça veut dire embrasses-moi 어느 나라에선가 나를 안아달라는 뜻이라면 Besame besame mucho 내게 키스해 줘요 더 많이 키스해 줘요 Toute ma vie je voudrais la chanter avec toi 평생동안 이 노래를 너를 위해 부르고 싶네 Besame besame mucho 내게 키스해 줘요 더 많이 키스해 줘요
Dalida(달리다)는 1933년 1월 17일에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Yolanda Gigliotti(요란다 질리오티)란 본명으로 태어났다. 양친은 모두 이탈리아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오케스트라의 제 1 바이올린을 켜던 음악가였다. 그러나 Yolanda Gigliotti가 처음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음악적인 재능보다 천부적인 미모에 의해서 였다. 1954년에 그녀는 21세의 나이로 미스 이집트에 뽑힌 것이다. 이 영광은 그녀에게 스크린에 데뷔할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Le Masque De Toutankhamon(투탄카몬의 가면), Un Verre Et Une Cigarette(술잔과 담배)등의 영화에서 주목을 받은 그녀는 그해 크리스마스에 홀홀단신 프랑스의 파리로 건너온다. 파리의 한 카바레에서 L'etranger Au Paradis(천국의 이방인)이란 노래를 부르며 인기를 모은 그녀는 여기서 만난 레코드사 사장 Eddie Barclay(에디 바클레)의 도움으로 첫 레코드 Bambino(밤비노)를 취입하였다. Dalida는 곧 유럽 전역에 걸쳐 일류 가수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곳에서 만난 더욱 중요한 남자는 방송국 프로듀서였던 Lucien Morris(뤼시엥 모리스)였다. 4년간의 약혼기간 후에 그들은 결혼식을 올렸지만 성격차이로 곧 이혼했다. 1966년 8월 Dalida는 로마에서 27세의 음악가 Luigi Tenco(루이지 텐코)를 만났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장 이상적인 남성이었다. 그해 10월 Dalida를 위해 Cia Amore Ciao(사랑이여 안녕)을 썼다. 그는 이 곡으로 산레모 가요제에 출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노이로제에 시달리던 Luigi Tenco는 결선 하루 전날 밤에 38 구경 권총을 머리에 대고 자살해 버렸다. Dalida는 Luigi Tenco 대신 무대에 올라 눈물을 흘리며 이 노래를 불렀다. 1967년 그녀는 처음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자살 미수였다. 신께서 나를 거부한 것에 너무 감사해요. 다시는 죽지 않을 겁니다 라고 Dalida는 자실 사건 이후에 인터뷰를 통해 말했다. 그리고 병원에 찾아온 첫 남편 Lucien Morris에게 내가 어제 자살을 기도했어요. 내가 한짓을 당신은 부디 하지 마세요 라고 울면서 말을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Lucien Morris는 자살해 버렸다. 1973년 3월 그녀는 생제르맹의 백작으로 알려진 리사르 샹프레와 다시 결혼했지만 7년만에 이혼했다. 이혼으로부터 3개월후 샹프레 또한 가스 자살을 행했다. 가수로서는 화려한 생을 보냈지만 한 명의 여성으로서는 더없이 상처받은 생을 보낸 Dalida.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생을 사랑했다. 그녀가 죽기 전날까지도 그녀에게서 죽음의 기미를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Dalida의 생애를 특집으로 보도한 Paris Match(파리 마치) 지의 기사 중에 인상적인 문장이 있다. 그녀는 끊임없이 생을 열망했음에도 죽음은 끊임없이 그녀를 유혹했다. 결국 Dalida는 죽음의 유혹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날 용서해 줘요. 인생은 정말 견디기 힘들어요. 란 짧은 유서를 남기고 사랑의 여신 Dalida는 사라져 갔다. 1987년 5월 3일 그녀의 나이 54세였다. Alain Delon(아랑 드롱)과 함께 부른 Paroles Paroles(달콤한 속삭임)로 우리의 기억속에 새겨져 있는 샹송 가수 Dalida. 그리고 조금 일찍부터 Dalida에게 주목한 사람들은 첫 히트곡 Bambino에서의 정열적인 남구의 매력을 무한히 느꼈을 것이다. Dalida의 인생은 화려했고 Dalida의 곁에는 항상 연인이 있었지만 Dalida의 사랑에는 언제나 자살이란 기묘한 단어가 운명처럼 따라다녔다. 마침내 이 불행한 운명은 Dalida 자신의 것으로 되어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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