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죽여버릴 수 있나요"
[인타뷰]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 응우옌 떤 런-응우옌 티 탄
입력 15.04.07. 22:21 (수정 15.04.08. 09:47)
[오마이뉴스 이희훈,김도균 기자]
▲ 베트남전 '민간학살' 피해자 언론 인터뷰가 열리는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 앞에서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이 '월남전 참전 용사들이
모욕당했다'고 주장하며 항의 집회를 열고 있다.
ⓒ 이희훈
▲ 항의 집회하는 고엽제 전우회
베트남전 '민간학살' 피해자 언론 인터뷰가 열리는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 앞에서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이 '월남전 참전 용사들이
모욕당했다'고 주장하며 항의 집회를 열고 있다.
ⓒ 이희훈
"참전용사 모욕하지 마라" "민간인 학살 운운, 거짓말 하지 마라"
7일 오후 서울 시내 모처.
커튼을 쳐둔 창밖으로 날선 구호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방한 중인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
응우옌 떤 런(남·64)씨와 응우옌 티 탄(여·57)씨가 기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초 이날 오후 7시에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베트남전 관련 사진전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리셉션 행사가 베트남전 관련단체의 압력으로
취소된 터였다.
▲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피해자인 응우옌 떤 런(NGUYEN TAN LAN)씨와
응우옌 티 탄(NGUYEN THI THANH)씨가 언론 앞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희훈
"내가 있던 자리에서만 65명이 한국군에게 희생당해"
베트남전 당시 한국 군인들에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두 사람에게
면전에서 자신들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참전 군인들의 모습은 어떻게 비쳤을까.
"여러분들에게 한국 군인들이 우리 베트남에 있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제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고 싶습니다.
참전 군인들이 저를 보시기가 좀 껄끄러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좀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응우옌 떤 런씨.
그는 15살이던 1966년 2월 13일을 잊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가족들과 이웃사람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아대던 군인들
어깨에 붙어있던 호랑이 마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 군인들은 우리 가족을 포함한 25가구의 마을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고개를 숙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한 5분 정도 지난 후, 어떤 군인이 크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고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오고
수류탄이 떨어졌어요.
사방에 포연이 자욱한 가운데 주변에는 팔이 잘린 사람, 하반신이 잘린 사람, 창자가 흘러나오고
뇌수가 흘러나온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어요.
부모들은 자식의 이름을 부르고, 자식은 부모를 찾는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응우엔 떤 런씨는 이날 어머니와 13살이던 여동생을 잃었다.
"제가 있던 자리에서만 65명이 한국군에게 희생당했습니다.
바로 제가 목격자이고 생존자입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제 심장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만 말을 하는 겁니다."
▲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생존자 응우옌 티 탄(NGUYEN THI THANH)
ⓒ 이희훈
"총 쏘고, 불 지르고, 칼로 찌르기까지..."
응우옌 티 탄씨 가족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은 1968년 2월 12일이었다.
"당시 저는 8살이었지만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국군들이 입었던 얼룩무늬 군복을 기억합니다.
몇 명의 군인들이 제가 숨어 있던 방공호에 폭탄을 던지는 시늉을 하면서
나오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같이 있던 이모가 나가라고 해서 방공호를 나갔는데, 한국 군인들이 총을 쐈습니다.
오빠는 덤불숲에 엉덩이가 날아간 채 쓰러져 있었고,
언니는 대나무 숲에서 죽어 있었습니다.
이모는 집에 불을 지르려던 군인을 말리려다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다섯 살이었던 제 동생은 숨을 쉴 때마다 쿨럭 쿨럭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때 전 너무 어려서 동생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응우옌 티 탄씨 마을에서는 모두 74명이 목숨을 잃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학살 당시 장에 갔던 어머니도 시신무더기 속에서 발견됐다.
그렇게 응우옌 티 탄씨는 고아가 됐다.
한쪽 엉덩이를 잃고 장애인이 된 오빠와도 헤어진 응우옌 티 탄씨는
다낭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퇴원한 뒤에는 작은 아버지 아이들을 돌보며 10년을 살았다고 했다.
8살에 고향을 떠난 그는 18살이 돼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죽여버릴 수가 있나요?
그때는 사는 게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서 순간 순간 죽고 싶었어요.
정말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마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저도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으며 공부도 할 수 있었을 텐데요."
끝내 응우옌 티 탄씨는 울음을 터트렸다.
▲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생존자 응우옌 티 탄(NGUYEN THI THANH)씨
ⓒ 이희훈
"위로 원했는데, 한국와서 이런 일 겪을 줄은..."
"제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한국에 와서는 좋은 분들을 만나서 위로를 받고 싶었을 뿐입니다.
참전했던 군인 분들도 만나고 싶었어요.
그분들로부터도 위로를 받고 싶었는데, 한국까지 와서 이런 일을 겪게 될지는 몰랐습니다."
이날 베트남 참전단체들은
응우엔 떤 런씨 본인과 아버지, 형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 활동을 했다는 플래카드를 걸어놨다.
정당한 전투행위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듯 보였다.
이런 주장에 대해 응우엔 떤 런씨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학살이 일어났을 때 저는 겨우 15살이었고,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집에 있었을 뿐입니다.
설사 백보 양보해서 참전군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쳐도 다른 죽음들은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나는 그렇다치고 응우옌 티 탄씨가 당한 일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다 여자들과 아이들뿐이었는데…."
이날 통역을 맡은 평화운동가 구수정씨는
"베트남이 통일된 후 과거 베트콩 활동을 하다 죽거나 다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국가차원에서 철저히 이뤄졌다"라면서
"베트남 정부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분들이 민간인이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했다.
▲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피해자인 응우옌 떤 런(NGUYEN TAN LAN, 오른쪽)씨와
응우옌 티 탄(NGUYEN THI THANH)씨가 언론 앞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희훈
"그날이 되면 우리는 '따이한' 제사를 지냅니다"
응우옌 떤 런씨는
방한 첫날 나눔의 집에서 만났던 위안부 할머니들에게서 같은 전쟁피해자로서
동질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분들도 저희들과 똑같은 피해자였습니다.
그분들은 일본군에 의한 피해자들이고 저희는 한국군에 의한 피해자라는 점,
한 가지만 달랐습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의 시신을 채 수습하지 못했던 것이 평생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다는 응우옌 티 탄씨는
가족묘를 만드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그날이 되면 우리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제사를 지냅니다.
그 제사를 어머니 제사, 동생 제사, 언니 제사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제사를 따이한(大韓) 제사라고 부릅니다."
살아남은 피해자들이 학살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는데도,
한사코 이를 부인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베트남전 관련 단체들의 태도를 보면서
베트남전이 끝난 지 40년이 흘렀지만 아직 기억 속의 전쟁은 끝나지 않은 듯했다.
응우옌 떤 런씨와 응우옌 티 탄씨의 조용한 흐느낌 소리 위로 스피커에서 나오는 군가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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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과의 대면
베트남 빈호아 마을에는 때아닌 죽음을 맞이한 가족들을 가슴 속에 묻어야만 하시는
한 할아버지께서 계십니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한국군에 의해서 어머니와 손주를 잃으셨습니다.
한국군은
평화롭던 마을에 갑자기 나타나서 잔디밭에 주민들을 모았습니다.
한국군은
어른, 아이, 여자, 노인 할 것 없이 마을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당황해서 옆의 언덕으로 도망을 쳤지만 그들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한국군이 철수한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누구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워진 시체들을 모아서
단체 무덤에 묻어야 했습니다.
빈호아 학살로 인해서 수 백 명이 죽었다는 공식 기록이 남아있지만,
희생자의 숫자는 수 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도 그 잔디밭에는 빈호아 증오비가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라고 기록하며
그 학살의 증거로 남아있습니다.
홀로그램 팀원들이 만난 분들은
이 할아버지처럼 전쟁으로 인한 아픔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매일 살아내야만 하는 분들이고,
그 전쟁의 기억이 왜곡되거나 잊혀져 가는 것으로 인해 두 번 아픔을 겪으셔야 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제한된 각도의 역사인식
"올해는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
베트남 전쟁 종전 40주년 입니다"
하지만
베트남전쟁 당시 돌아가신 분들을 마음속에 묻을 수 밖에 없었던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
고엽제 등 전쟁의 참상으로 인해 심신의 악몽에 시달리시는 한국의 참전 군인들,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유린당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그리고 패전국이기에 고통을 호소할 곳도 없었던 일본의 원폭피해자들 모두
아직도 전쟁의 아픔에 붙들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쟁 같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각자 다른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고,
따라서 사람들은 다양한 각도의 이야기들을 알기 어렵습니다.
제한된 각도의 역사인식은 편파적인 역사관을 갖게 하기 쉽고,
그렇기에 다른 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은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대화가 되지 않는다며 소통 자체를 포기해버리기도 합니다.
저희는 현재의 표면적인 평화를 흐트러뜨릴 수도 있는 이 불편한 진실들을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어떻게 보면 잊어가려는 아픔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고,
서로 몰랐으면 가지지 않아도 될 실망감을 안겨줄 수도 있겠지만,
서로의 입장에 대해서 듣고, 그 논리를 이해할 때 진정한 의미의 대화와 화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저희 홀로그램은
평화교육 교재를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이 교재는 3장으로 구성될 것입니다.
1장은 2차 세계대전(대동아전쟁)과 관련한 한국-일본의 관계에 대해 다룰 것이고,
2장은 베트남전쟁(제2 인도차이나 전쟁)과 관련한 한국-베트남의 관계에 대해 다룰 것입니다.
3장은 위와 관련한 홀로그램의 활동과 활동을 하면서 아시아 청년들과 나눈 생각들을 갈무리하여
교재로 내놓고자 합니다.
자칫 또 다른 형태의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작업이라는 점을 알기에
최대한 균형 잡힌 시각으로 다양한 입장들을 제공하여 독자 스스로 사고할 수 있도록 유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프로젝트에는 베트남, 일본, 한국에서 역사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다.
4월부터 모여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7월 8~14일은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후원을 받아 베트남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8월 19~26일에는 일본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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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금은 현지 답사비, 교재연구 워크숍비, 인쇄비, 그리고 프로젝트 홍보비로 사용할 예정입니다.
저희들의 도전에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 드립니다.
모금된 후원금은
취재 비용 및 다각적 역사인식 프로젝트 홀로그램의 일본 답사 비용으로 사용될 예정입니다.
저희와 다각적 역사인식을 함께 만들어가 주세요.
1천 원 이상 후원시 홀로그램 평화교육 세미나에 초대해 드립니다.
2만 원 이상 후원시 1천 원 리워드와 함께 베트남, 일본 답사 성과 공유회 자료를 드립니다.
5만 원 이상 후원시 2만 원 리워드와 함께 일본답사 기념품
(교토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박물관 디자인 공모 수상작 Peace Style 배지와 국제평화박물관 손수건)을
드립니다.
10만 원 이상 후원시 5만 원 리워드와 함께 베트남 답사 기념품(열쇠고리) 및 답사지 포토북
(베트남, 일본 답사 현장 사진 자료와 설명: 20p 내외)을 드립니다.
10만 원 이상 후원자 중, 추첨을 통해 10분께 리워드와 함께 홀로그램 1기 활동 종합 보고서(연말 출간 예정)를
드립니다.
by 유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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