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관

시게미쓰와 신격호가 합작 투자? 한 사람인데?

기산(箕山) 2015. 8. 12. 10:03

시게미쓰와 신격호가 합작 투자? 한 사람인데?

 

 

                                                                                             미디어오늘 | 입력 2015.08.12. 09:24

                                                                                             [미디어오늘문형구 기자]

 

[한국 재벌의 탄생과 세습 ①]

박정희가 특별히 아꼈던 롯데… 한일회담 막후 교섭 대가로 특혜 성장

한국에 입성할 당시 신격호의 롯데는

이미 일본에서 연 매출 700억 엔 규모의 종합 과자 메이커로 업계 1위를 다투고 있던 기업이었다.

 

롯데가 한국의 다른 재벌들과 달리 매점매석이나 사카린 밀수 같은 원시적 축적의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있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1922년 생인 신격호는 20세가 되던 1941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선반용 기름인 커팅 오일 제조를 시작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사업은

1947년 경엔 비누와 포마드 등을 만드는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로 자리를 잡았고

1948년엔 (주)롯데를 만들어 껌 제조를 시작해 10년뒤엔 일본의 껌 제조업계 1위인 하리스를 추격하고 있었다.

신격호 회장이 롯데제과주식회사를 국내에 설립한 것은 1967년이며,

국내 투자가 본격화된 것은 73년 (주)호텔롯데의 설립 이후다.

 

70년대 서울시 도시계획을 맡았던 손정목 교수는

저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1970년 11월 13일 박정희가 신격호 회장을 청와대에서 만난 것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박정희와 신격호의 인연은 한일협정이 맺어진 65년 이전으로 그 뿌리가 거슬러올라간다.

 

 

▲ 1974년 방한한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아래는 1961년 11월 12일 박정희와 이케다 하야토 일본 수상의 회담.

사진제공 국가기록원

 

 

두 사람 사이엔 일본 극우의 좌장격이었던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와

기시의 후계자이자 박정희와도 절친이었다는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등이 있다.

박정희는 쿠데타 얼마 뒤인 1961년 11월 11일과 1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라는 지위를 갖고

일본을 찾아 이케다 당시 수상 등과 정상회담을 갖는다.

 

12일 저녁엔 박정희가 주최한 만찬회가 있었는데 이 자리엔 기시 노부스케와 함께

만주국 군관학교장이었던 나구모 신이치로도 참석했다.

 

정운현(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전 사무처장)에 의하면

그를 이 자리에 초청한 것은 박정희였으며, 공식 축배가 끝난 뒤 박정희는 테이블 맞은 편에 있던

나구모에게 술병을 들고 가 "머리를 조아리고는" 술을 올렸다.

그러면서 박정희는 "유창한 일본어로 "교장 선생님, 건강하십니까?"라고 인사했다.

 

이를 보고 이케다 수상은

"사은(師恩, 스승의 은혜)의 미덕을 안다는 것은 우리 동양의 미덕으로,

박정희 선생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라고 화답했다.

61년 11월 일본 방문에서 벌어진 국가 최고실권자에 어울리지 않는 박정희의 여러 행동은,

정운현의 표현을 빌자면

자신이 '만주인맥'이라는 사실을 일본의 고위관료들에게 확인받고 이후의 한일관계를

박정희 군부에 유리하게 도모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카키 마사오' 논란으로 잘 알려진 박정희는 만주국 군관학교 출신이다.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는 만주국 산업부 차장이었고

1965년 2월 17일에 방한하게 되는 시이나 에쓰사부로(推名悅三郞) 일본 외상은 만주국 당시 기시의 부하였다.

한일협정이 맺어질 65년 당시의 일본 수상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는 기시의 친동생이다.

1961년 박정희 군부의 방일 이후

65년 한일협정으로 이어지는 양국의 밀실외교에서 신격호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난 2005년에 공개된 한일회담 외교문서엔 신격호라는 이름이 여러차례 등장하는데

그는 한일 회담의 '막후 교섭자'이자 창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62년 6월 6일 주일대사가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롯데껌 회사 사장 신격호의 이세키(伊關祐二郞, 당시 일본 외무성 아시아국장) 면담 보고' 문서엔

그에 대한 소개가 나온다.

 

"신격호는 한국 상공회 고문으로 당지 교포간에 인망이 높고 한일 실업인 간에 신망을 많이 받는 자인바

대장성 이재국장 '이나마바스 시게루'와 개인적으로 또는 가족적으로 매우 두터운 친분관계를 가지고있다함"

이라는 것이다.

 

이 문서엔

일본 측이 제시하는 청구권 액수와 이세키 국장의 방한 시기에 대해 이세키가 신격호와의 면담에서 밝힌 내용이 나온다.

같은해 8월 10일 '오노 신조, 후루타 쓰네지, 신격호와의 석찬회동 보고'에선

"오노씨가 오히라 외상의 부탁을 받고 한국측의 청구권에 관한 사고방식을 문의차

회담할 기회를 만든 것 같은 인상을 주었음"이라고 되어 있다.

 

1963년 2월 7일 '일본요인과의 면담 보고'에도 신격호가 등장하는데

이 면담 자리엔 오노 반보쿠 자민당 부총재을 비롯해 가와지마 쇼지로 행정관리청장관, 자민당 총무회장인 아카기 무네노 등

당시 이케다 내각의 요인들이 참석했다.

 

이 문서엔

"신격호씨는 아츠마 동경도지사와 특별한 친분관계에 있음으로 동경도지사 선거문제에 관하여 (JW-02087 2항참조)

현황과 전망을 파악하기 위하여 그의 출석을 요청했음"이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기시 노부스케를 정점으로 하는 만주인맥과 박정희는 61년말 방일을 통해 본격적인 교류에 들어갔는데,

신격호 회장의 경우에는 50년대 말에 기시와 인연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신 회장은 기시 노부스케에게 미국의 껌 메이커인 리글리의 일본 진출과 관련된 진정을 넣은 적이 있고

이에 기시가 성심껏 자신을 도와주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리글리가 일본에 진출한 것은 1956년이다.

 

그가 가진 일본 정계에서의 화려한 인맥의 배경과 관련해, 그의 일본인 부인인 시게미쓰 하츠코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 당시 부상을 당한 시게미쓰 마모루(A급 전범) 가문이라는 얘기가

한일 양국에서 정설처럼 되어 있지만 현재 롯데그룹은 이같은 내용을 부인하고 있다.

잘 알려진 바 신격호 회장의 일본 이름은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다.

박정희와 신격호가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부에게 경제개발의 자금줄이었던 일본과의 수교가 사활적인 문제였고,

신격호는 당시 한일회담의 막후 교섭자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60년대 초반에 만남이 이뤄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신격호는 1965년 서울에서 이후락 비서실장과 만났고

이후락으로부터 박정희의 제철소 건설과 관련한 사전작업을 요청받은 바 있다.

신격호가 국내에 진출한 1967년 이후, 롯데가 국내 재벌로 성장하게 되는 단초가 된

73년 호텔롯데 설립 당시엔 박정희가 직접 신격호에게 전화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박정희는 한일회담의 막후 중재자 역할을 수행해 준 신격호에게 각종 특혜로 보답한다.

호텔롯데의 투자금은 100% 일본 롯데에서 나온 자본이었다.

 

그런데 당시 국내법은 외국인이 49%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거나 경영을 못하게 돼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에 재일교포인 시게미쓰(신격호)와 대한민국 국민 신격호가 호텔롯데의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편법을 묵인해줬고, 외자도입특례법을 통해 소득세 법인세 취득세를

면제해주는 특혜도 제공했다.

 

호텔 건으로 박정희가 신 회장을 부른 11월 13일은

롯데제과의 껌에서 쇳가루와 모랫가루가 나와 제조 정지를 받은 날이기도 했다.

 

이같은 이상한 계약 내용을 일본 대장성으로부터 승인받는 데는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대장성 장관이

힘을 쓴 것으로 알려져있다.

후쿠다 다케오는 신격호가 후견인 역할을 해준 인물이며 박정희와도 친분이 깊다,

 

 

▲ 지난 6일 오후 서울 잠실 롯데호텔 옥상에서 홍보도우미들이

롯데월드 타워에 설치된 태극기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롯데물산 측은 이날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롯데월드타워에 가로 36m의 태극기를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 연합뉴스

 

 

박정희 정권 하에서 신격호의 롯데는

1973년 롯데기공과 롯데파이오니아 설립,

1974년 롯데산업과 롯데상사,

1978년 평화건설과 삼강 인수 및 롯데햄, 롯데우유 설립,

1979년엔 호남석유화학 인수, 롯데쇼핑 설립 등

한국의 재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롯데의 빠른 성장의 배경엔 박정희 정권으로부터의 특혜와 함께 일본 본사의 거래 은행으로부터

저리의 돈을 끌어쓸 수 있었던 것,

일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 주요 교통 요충지들의 부동산을 사모을 수 있었던 것도 자리하고 있다.

 

1989년 기준 부동산 보유현황을 보면 당시 신격호 회장은 재벌순위 10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부동산 보유액의 경우 정주영, 이건희, 구자경, 김우중에 이어 5위를 차지하고 있다.

신격호 회장은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전후 일본의 혼란상과 한국전쟁 특수 속에서 재산을 모았다.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화려한 정계 인맥은 롯데재벌이 성장하는데 있어서 밑거름이 되었다.

 

신 회장이 한국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의 고위층과 깊은 인연을 맺은 것은

사업가로서의 본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신격호 회장은 박정희 정권 당시 맺어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박태준 등과의 인맥을 통해

1991년 '3당 합당'의 조정자 역할을 한 것으로도 기록돼 있다.

 

 

롯데 지분구조 복잡해, 형제끼리 분할 쉽지 않아 2015-08-12 09:21

시게미쓰와 신격호가 합작 투자? 한 사람인데? 2015-08-12 09:16

“저더러 빨갱이라던 친구, 지금은 미안하다고 해요” 2015-08-12 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