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요십조(訓要十條) 8항 차현이남 공주강, 해석 및 진위여부
2009-01-07 17:40
출처 : 인터넷
http://k.daum.net/qna/openknowledge/view.html?category_id=QN&qid=3ip4X&q=
%EA%B3%B5%EC%A3%BC%EA%B0%95&srchid=NKS3ip4X
훈요십조 8항 원문을 보면 :
其八曰車峴以南公州江外山形地勢並趨
背逆人心亦然彼下州郡人參與朝廷與王
侯國戚婚姻得秉國政則或變亂國家或銜
統合之怨犯蹕生亂且其曾屬官寺奴婢津
驛雜尺或投勢移免或附王侯宮院姦巧言
語弄權亂政以致灾變者必有之矣雖其良
民不宜使在位用事.
여기서 문제가 되는 車峴以南, 公州江外의 지역은 어디인가?.
한자를 보면
車峴의 峴은 볼見에 뫼山이 옆에 붙어있는 고개/재 峴자로 산이 보이는 높지않은 지역를 뜻하는 글자다.
嶺이란 거느릴領에 뫼山을 머리에 이고있는 글자로 산들을 거느리고 있는 높은 지역을 뜻하는 글자다.
구릉지와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고개나 재가 많으며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가는 종적개념으로
지역의 높낮이에 따라서 峴와 嶺를 선택하여 사용했다.
峴을 사용한 예를 보면,
한양에 있는 大峴/阿峴/梨峴/紅峴/車峴/雲峴/藥峴/餠市峴/瓦署峴/西學峴/綠礬峴/論峴,
개성의 泥峴/銅峴/不朝峴/朱雀峴,
성남의 金峴/走川峴/陽峴/書峴,
인천의 葛峴/橘峴/三呼峴,
다산 정약용의 고향 남양주 馬峴처럼 지역내에서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주는 구릉지같이
높이가 낮은 고개에서 사용되었고,
嶺을 사용한 예를 보면
鐵嶺, 寒溪嶺, 陳富嶺, 彌矢嶺, 大關嶺, 花折嶺, 鳥嶺, 秋風嶺, 車嶺, 六十嶺처럼 높고 험준한
백두대간을 넘나드는 지역과 지역을 연결해주는 곳에서 사용되었다.
문제는 훈요십조를 원문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원문의 峴이란 글자를 嶺으로 바꿔치기하여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峴자를 嶺자로 바꿔치기하는 것도 모자랐는지 한술 더떠서
종적개념인 峴자를 산맥처럼 길다란 횡적개념인 산맥으로 왜곡하여
원문의 車峴以南을 車嶺山脈以南으로 조작함으로써 원문의 뜻이 완전히 달라지도록 만드는 사람이 있다.
車嶺山脈 명칭은 1903년 일본의 지질학자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가 처음 만들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용어로 일제시대 이전의 산경도나 지리서에는 없는 명칭이다.
고토분지로가 명명한 車嶺山脈은
백두대간이 오대산 부근에서 분기하여 남서로 뻗어 충청북도와 경기도의 도계를 이루고
충북과 충남 경계지역에서 끊겼다가 다시 충남 북부지역에 나타나 서해까지 뻗은 산맥이다.
고문서/기록들을 보면
車峴 지명이 있는 곳은 평북 정주시, 평양시 순안구역, 황해도 은율군, 漢城府 車峴大路, 충북 음성군,
충남 연기군, 경남 산청군이고
車嶺 지명이 있는 곳은 평북 초산군, 충남 천안군, 강원도 정선군이다.
그중 충북 음성군의 차현고개(수레티고개라고도 하며 한자로 표기하면 車峴고개)는
지금도 사용되는 지명으로서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과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사이에 있다.
지금도 차현고개 표식이 남아있으며
차현고개 주변은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산성, 사찰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그림1, 그림2, 그림3)
따라서 훈요십조 8항에 기술된 車峴은
고토분지로가 명명한 車嶺山脈이나 높고 험준한 충남 천안의 車嶺과 같은 지역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다음으로
훈요십조 8항 車峴以南, 公州江外의 公州江外는 어디이고 錦江과 公州江은 같은 개념인가.
고지도와 조선시대 山經表등을 보면
白頭大幹의 淸北正脈과 淸南正脈사이에 있는 강을 淸川江이라 하고,
漢北正脈과 漢南正脈사이에 있는 강을 漢江이라 하고,
錦北正脈과 錦南正脈사이에 있는 강을 錦江이라 하며,
洛東正脈에 있는 강을 洛東江이라 했다.
동국여지승람 등에 보면
금강은 지나가는 지역에 따라 옥천지역은 赤登津江, 청주지역은 淸州江, 연기지역은 芙江, 웅진지역은 熊津江,
부여지역은 白馬江, 하류지역은 古城津江으로 불렀으며 강 전체를 뜻하는 금강과는 다른 개념이다.
웅진이란 지명이 통일신라 경덕왕때 웅주로 바뀌었고
태조 왕건이 웅주를 公州로 개칭하였으며 공주지역을 흐르는 강 이름도 지명에 따라 공주강으로 개칭되었다.
(그림4)
한강이
지역에 따라 홍천강, 평창강, 주천강, 동강, 소양강, 북한강, 섬강, 남한강, 임진강으로 불리지만
강 전체를 뜻하는 한강과 개념이 다르고,
낙동강이
지나가는 지역에 따라 안동강, 밀양강, 영강, 금호강, 남강이라 불리지만 강 전체를 뜻하는 낙동강과 다른 개념이며,
영산강이
지역에 따라 오례강, 증암강, 극락강, 황룡강이라 불리지만 강 전체를 뜻하는 영산강과 다른 개념이고,
만경강이
고산천, 소양천, 탑천, 삼천과 전주시를 지나는 전주천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錦北正脈과 錦南正脈사이에 퍼져있는 강 전체를 뜻하는 錦江과 公州고을을 흐르는 公州江은 다른 개념이다.
궁예는 변란을 피해 차현고개 인근의 칠장사에서 유아때부터 10여세까지 보냈다.
그런 연유로 청주지방 일대는 궁예의 고향으로서 정치적 기반이 되었으며,
궁예가 청주출신 사람들을 각별히 신임하여 중용하였고,
왕권강화를 위해 청주사람들(一仟戶)을 철원으로 이주시켜 왕조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궁예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궁예의 고향이자 왕조의 기반이었던 청주지방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궁예의 추종세력들인 청주지방의 임춘길, 이흔암, 선장형제 등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서
왕건이 그지방 호족들에게 동물의 성씨를 내리면서까지 탄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청주위쪽 차현고개 아래의 진천은
고구려/백제 멸망에 앞장선 김유신장군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태조 왕건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김유신을 안좋게 평했다.
왕조가 바뀌면 이전 왕조의 기반이 되었던 지역은 새왕조에서 경계하게 되고,
또한 이전 왕조의 기반이 되었던 지역은 옛 영화를 되찾고자 틈만나면 도발함으로,
왕건이 궁예의 기반이었던 청주지방을 경계하라는 유훈을 남긴 것으로 보여진다.
태조 이성계가 개성사람들을 많이 살상하고 과거를 못보게 했던 기록이 있는데
같은 맥락이다.
고려초 기록을 보면
本州인 개성/경기도와 배류하는 강으로 낙동강, 섬진강을 지목했는데
그 이유는 본주를 등지고 남쪽으로 흐른다는 이유에서 였다.
청주강(미호천/무심천-청주강-부강)은
충북 음성군 부용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충남 연기군에서 전북쪽에서 오는 지류와 합류하여 부강을 이루고,
공주지역으로 흘러가서 공주강을 이룬다.
고려초 풍수에 따르면 청주강은 본주와 배류한다.
따라서 위와 같은 내용들을 가지고
훈요십조 8항의 車峴以南, 公州江外를 그대로 해석하면
차현고개 아래와 공주고을을 감싸고 흐르는 공주강 바깥쪽 사이의 지역을 말함이니
지도를 보면 지금의 청주지방이 된다. (그림5)
훈요십조 8항의 표기 방식으로 朴達峴以南 安東江外라 하면
박달고개이남과 안동고을을 흐르는 안동강과의 사이인 단양, 영주, 예천을 말하는 것이며
소백산맥이남과 낙동강이남 전체를 뜻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훈요십조의 원문 車峴以南, 公州江外을 해석하면서
차현고개를 차령산맥이남으로 왜곡하고 공주강은 금강으로 왜곡하여
원문의 뜻과는 전혀 다른 뜻이 되도록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주장하는 방식으로 해석하여 車峴以南을 차령산맥이남으로 해석하면
충청도이남 전체와 경상도 서부지역이 포함되고 車峴以南을 빼고 公州江外을 금강지역 전체로 해석하면
금강은 크게 전북과 충북에서 발원한 지류(몇몇 고지도는 충북에서 발원한 금강지류를 더 굵고 길게 표시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청주강이라 표기)가 충남에서 만나서 금강이 형성되므로
전북에서 발원한 지류로 보면 충청도 중부/남부와
전라도, 충북에서 발원한 지류로 보면 충청도 동부와 경상도로 삼남지방 대부분이 해당된다.
그러나 훈요십조8항에서 차현이남을 빼고 공주강만을 해석하는 것도 명백한 오류이다.
정사를 기록한 고려사, 경국대전과 속경국대전 등에서 언급한 차별지역은 따로 있다.
후삼국시대 말에 풍수도참설을 완성시킨 도선국사는
전라북도 성수산(聖壽山)이 천자봉조지상(天子奉朝之像)으로서 산세가 왕기가 서린 지역이라 하여
초야에 묻혀있던 왕건을 데려다 성수산에서 기도하게 하고 고려를 개국하였으며,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 이방원 등도
성수산에 와서 조선 건국을 위한 기도를 올리거나 근처에서 사냥을 한 기록이 곳곳에 남아있고,
성수산 上耳庵에 친필유적이 남아있다.
조선왕조에서 전라도는 왕조의 본향으로 풍패지향이라 불렀으며
전라도 감영이 있던 전주성은 풍패를 따서 남문은 풍남문, 서문은 패서문, 귀빈들이 머무는 객사인 풍패지관과
조선왕조의 시조묘인 조경단, 역대 성군들을 모신 경기전 등이 있다.
왕조의 본향이라는 자부심은 왜란/호란같은 국난시에 가장 많은 군사들과 의병들을 배출했고
구한말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궐기한 의병의 40%를 차지했다.
호란때 조선왕조에 반감이 심했던 지역에서 모병활동을 하지 않았던 예만 보아도 왕조에 대한 충성심의
지역적 차이를 알 수있다.
훈요십조 車峴以南과 車嶺山脈以南이 같고, 公州江과 錦江이 같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인가.
국사학계 자료에 의하면 식민사학자 이병도이다.
이병도는 누구인가.
조선을 팔아먹은 이완용의 종친으로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여 일제의 조선통치를 정당화하는
식민사관이론을 만들고 주입시킨 인물이다.
이병도는 종친인 이완용이 팔아먹은 조선에 대해 충성을 바치기는 커녕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고
광주학생운동 같은 전라도지역의 조직적인 반일운동과 서재필, 김성수, 송진우, 김병로 등
정계와 재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전라도출신들의 항일투쟁으로 신상의 위협과
자신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식민정책 시행에 가장 큰 걸림돌인 전라도지역에 반감을 가졌을 것이다.
해방후 이병도는
시대가 바뀌자 종친인 이완용의 매국행위를 지우려 원광대에 있던 이완용의 자료를 훼손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국사학계 장악에 나섰다.
친일파들을 배척하지 않은 이승만/박정희 정권에서 국사학계를 장악한 이병도는
고조선, 삼한시대부터 일제시대까지 자신이 만들고 세운 이론들을 국사책에 집어넣었으며,
이병도의 수많은 제자들은 이병도가 만든 이론들을 전파하고 있다.
이병도의 훈요십조 8항 해석은
식민사학자적인 관점을 반영했거나, 사료들을 충분히 참조하지 않아서 학문적 오류가 있으므로
후학들은 선학에 대한 공경과는 별도로 학설을 올바르게 정립하여야 한다.
※추신:
고려초에 백제지역 호족, 귀족들이 중앙에 대거 진출하여 권력의 핵심이 되었고,
고려중기 17대 인종의 비 공예왕후 임씨가 전라도 장흥에서 출생하여 왕비가 되면서
이후 고려가 멸망할때까지 공예왕후계열에서 왕들을 배출했다.
또한 고려후기 26대왕 충선왕이 당시 왕실과 통혼이 가능한 '누대의 공신이요 재상의 우두머리'인
당대 1급 가문들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는데 :
언양김(彦陽金), 정안임(定安任), 경원이(慶源李), 파평윤(坡平尹), 안산김(安山金), 철원최(鐵原崔),
해주최(海州崔), 공암허(孔岩許), 평강채(平康蔡), 청주이(淸州李), 당성홍(唐城洪), 황려민(黃驪閔 ),
횡천조(橫川趙), 평양조(平壤趙), 전주김(全州金)
위의 15개 본관들을 보면
경기도 7개, 황해도 2개, 강원도 2개, 전라도 2개(정안임, 전주김), 충청도 1개, 경상도 1개이다.
본관 수가 충청도, 전라도보다 훨씬 많은 경상도가 1개인 것은 이채롭다.
또한 불교국가인 고려에서 국사는
왕을 계승할 권한이 있는 태자가 왕위를 버리고 승려가 되어 국사가 될 정도로 고귀한 지위이자
왕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기도 하는 자리였으며,
사대부들의 나라인 조선이 세도정치와 서원의 폐단으로 국력이 약화된 것처럼
불교의 나라인 고려는 승려들의 횡포와 사원의 폐단으로 국력이 약화되어
조선에서 '억불숭유정책'을 채택하는 부작용을 겪기도 한다.
불교국가 고려에서 최상류층인 승려들을 통솔하는 국사가
사찰이 전라도보다 훨씬 많은 경상도, 충청도 지역보다 전라도지역에서 대거 배출된 것은
개성/서경 세력에 이어 전라도지역이 제2의 권세를 누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료에 보면
이성계가 고려말에 전주에서 백성들을 모아놓고 개국의 뜻을 암시하는 대풍가를 부르자
정몽주가 백제성에서 부여국을 세우려는 뜻이라며 강력반발하여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정몽주의 천거로 출사한 경북 봉화출신 정도전의 조선왕조실록 졸기를 보면,
"그가 찬술(撰述)한 《고려국사(高麗國史)》 는 공민왕 이후에는 가필(加筆)하고 삭제한 것이
사실대로 하지 않은 것이 많으니, 식견(識見)이 있는 사람들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초까지도 일부 식자층에서는 고려, 백제, 신라계의 알력이나 지역감정이 있다고 볼수 있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역사서들에 대한 조작이 실제 있었으며
고려국사, 고려사절요 집필에 가담한 신라계 정도전이 훈요십조를 기술하면서 왜곡했을 가능성도 있다.
위의 결과로 볼때
전라도 지역은 고려초부터 고려중기/후기에 이르기까지 왕후장상을 상대적으로 많이 배출하였고,
훈요십조에 따라 전라도가 차별받았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오히려 경기도를 빼고 권세를 가장 많이 누린 지역이 전라도지역이니,
고려사절요에 기술된 현재의 훈요십조는
왕실의 1급 기밀문서를 사가에서 발견했다는 최제안이나 후대의 정도전 등이
조작했거나 해석상의 오류로 봐야 한다.
그림1.
조선중기 전국지도인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에 표시된 차현고개 위치.
(음성군 차현고개 주변에는 수레의산(車依山,679m), 수레울, 車谷, 車坪, 車坪川 등 車관련 지명이 많다)
그림2.
차현고개 주변 등산로(한남금북 제02구간:
차현 (수레티고개) – 마이산 (△472m) - 8번군도 (윗두리실) - 583지방도 (쌍봉1리) - 583지방도 (내송2리)
- 82번지방도 (방아다리) - 21번국도)
그림3.
차현고개 주변에 있는 화봉육교
그림4.
공주강이 감싸고 있는 안쪽의 공주목과 공주강 바깥(公州江外)을 표시한 고지도.
그림5.
차현고개와 공주강 사이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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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sk님 12.03.27
'山形地勢 병趨背逆' 해석 :
'산(강산; 땅)의 모양과 지맥/혈 등 땅기운이 개경(고려의 수도)을 등지고 거꾸로 흐르고 있어...'
태조 왕건이 지칭한 '(음성군)차현이남 ~ 공주강외(연기, 청주, 진천)'의 지형을 보면
산줄기와 하천이 개경을 등지고 남쪽으로 흐르고 있음.
** 금강은 동~서로 흘러서 '병추배역'의 형상이 아님.
'공주강외' 해석 :
공주(감영)에서 봐서 강 바깥지역. 즉 '공주읍내를 감싸고 있는 공주강의 (강건너)바깥지역'.
한자의 內/外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산, 강, 담장 등을 경계(기준)로 하여
그 안팎을 구별하는 것임.
'차현이남 공주강외'에 위치한 청원군
강내면은 청원읍내에서 볼 때 강안쪽 지역이라는 것이고,
(강을 경계로 하면 동남쪽 지역)
강외면(2012년부터 오송읍으로 개칭됨)은 청원군청에서 봤을 때 강바깥에 있는 면이라는 것임
(강을 경계로 하면 북서쪽 지역)
박기태님 11.07.13
첫째 가능성은 해석상의 오류일 확률이 더 크구요.
왜냐,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일본놈이 차현이남을 차령산맥으로
(차령산맥이란 이름은 1900년대 처음 생긴 산맥이름임)
공주강외를 공주강 바깥이라고 단순해석, 한문으로 외는 위라는 의미도 있음.
그 디음엔 신라계에 의한 백제계 견제를 위한 조작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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