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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극비문서, 거물급 독립운동가 행적 수록

기산(箕山) 2010. 3. 22. 16:34

日극비문서, 거물급 독립운동가 행적 수록

                                                              연합뉴스 | 입력 2010.03.22 15:47 | 수정 2010.03.22 16:03

                                                              (서울=연합뉴스) 김귀근 이상헌 기자

 

김구 친일파 암살지령-오인석.이상재 동향도"

 

1920년대 초반 일본 관동청 경무국이 작성해 극비로 분류했다가 최근 국가보훈처에 의해
공개된 문서에는 김구(金九) 선생을 비롯한 일부 거물급 독립운동가들의 드러나지 않았던
행적이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거물급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 행적이 기록된 '관동도독부 정황보고 및 잡보(찬)'는
한일 근대사의 권위자인 사학자 최서면(80.도쿄 국제한국연구원장) 선생을 비롯한
전문가와 학계 인사 등을 통해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발굴됐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뤼순 감옥을 담당하던 일제 행정기관인 관동도독부의 보고서인
이 문서는 대부분 관동청 경무국이 작성했다.

1922년 3월23일 작성된 '상하이 임정 북만(北滿) 불영선인단 연락' 부문에서는
상하이 임시정부 경무국장이던 김구 선생이 만주와 시베리아 방면에 연락, 일본 관리의 내정을
정탐하고 친일 조선인 암살을 지령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창춘경무서장이 보고한 김구 선생에 대한 이 자료는 처음 공개된 것이라고 보훈처 관계자는 전했다.

그간 체포 과정이 밝혀지지 않았던 오인석(吳仁錫) 선생에 대한 구인 기록도 드러났다.
1922년 5월2일 문서에는 "상하이 이륭양행에 잠복 중이던 오인석이 4월14일 아침에
삼도랑두(三道浪頭)를 향하는 상하이행 기선 '성도환'에 승선하였고 16일 삼도랑두를 출발했으나..
(체포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문서에는 이상재(李商在) 선생에 대한 기록도 있다.
안동경무서장이 보고한 이 문서에는 이상재 선생의 직업을 '조선기독교연합청년회 총무'로,
나이는 73세로 적혀 있다.
이 문서는 선생의 행적을 오해할만한 표현으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에 보훈처 관계자는 "일본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랬는지, 이 표현이 사실인지는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같은 날 역시 안동경무서장은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안중근 의사처럼 권총으로 거사할 것을
권고한 내용도 담고 있다.

안동경무서장은 "결사대 중 유조모(柳曹毛)는 부하 윤순길(尹順吉)과 국경 경비를 시찰하고..
보고한 내용을 들으면..폭탄으로 암살을 기도하는 것은 대개 실패로 끝나고,
성공한 자는 '안중근식 권총'이 최유효한 성적을 보이므로 금회에는 폭탄을 중지하고
윤순길, 김병광(金秉光) 등 2명을 선발해 각자 권총을 차고 탄환을 휴대하여 금명일 중
경성을 향해 출발"이라고 보고했다.

안 의사가 1909년 10월26일 허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한 의거가
독립운동가들의 행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말해주고 있다.

실제 안 의사 의거 이후 폭탄 투척이 상당 부분 실패했음을 암시한 기록도 나왔다.
1921년 11월12일 관동군참모부가 보고한 문서는 "박내만(朴乃萬), 이갑수(李甲秀) 등이
총독부에 폭탄 투척했으나 불발되어 경성부내에 잠복해 있다"고 기록했다.

1922년 6월 안동경무서장이 '철혈단(鐵血團)'의 구체적인 활동상황을 상세히 보고한
문서도 찾아냈다.

이 문서는 "1919년 재동경(도쿄) 조선인 유학생 간에 국권회복, 친일자 등
암살을 목적으로 조직된 철혈단은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동지를 규합 중"이라고 기록했다.

또 "하얼빈의 보고에 의하면 치타(知多) 부근에 근거를 둔 제3국제공산당 철혈단은
조선지역에서 지주와 작인(소작인) 간을 교란하고 점차 일반을 적화할 목적으로..
각 도에 2명씩 파견했다"고 적었다.

이에 보훈처 관계자는
"이 문서에 나타난 철혈단이 무슨 단체인지에 대해서는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 사위인 황일청(黃一淸)에 대한 기록도 발굴됐다.
황일청은 안 의사의 맏딸 안현생 여사와 상하이에서 결혼했다.

1922년 3월13일 봉천경무서장이 보고한 문서에는
"2월18일 상하이 불영선인 단원에게 밀정을 보낸 바 소식은 상하이 영계(英界) 원보리(元輔理)
236호내 황일청이 가정부(임시정부)의 명을 받아 비밀리 폭탄 제조에 종사한다고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보훈처 관계자는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발굴한 독립운동 자료에 나타난 89명의 새로운 독립운동가도
의미가 있지만 거물급 독립운동가들의 드러나지 않았던 독립운동 행적을 담고 있는데
더 의미를 둬야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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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