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관

김미화·최광기가 바라 본 촛불문화제와 소통의 가능성

기산(箕山) 2008. 8. 8. 01:14

김미화·최광기가 바라 본 촛불문화제와 소통의 가능성

 

                                                                                 2008년 8월 7일(목) 11:16 [레이디경향]



2008년의 촛불문화제는 새로웠지만 그를 둘러싼 온갖 ‘말’들은 진부했다.
이걸 아직도 20년 전의 틀에 끼워 맞추려는 일각의 시도는 답답하다.
‘배후세력’, ‘반미좌파’라는 말이 그렇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김미화씨는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행자의 중립적인 시각을,
최광기씨는 ‘거리의 사회자’로서 새로운 비전을 전달했다.
지금은 이 다음을 고민해야 할 때고, 키워드는 ‘소통’이다.

김미화의 균형

‘시국 진단’이라는 거창한 말은 필요 없었다.
문화평론가의 시각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MBC FM 시사프로그램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의 진행자로서,
당대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아줌마로서 평범하지만 냉철한 생각이 듣고 싶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가 촉발한 촛불문화제가 다양한 양상으로 번져가고 있어요.
사안은 심각한데 집회는 발랄한 면이 있어요. 어떻게 보세요?

김미화(이하 김) 시위 자체를 굉장히 즐기는 것 같아요.
예전처럼 심각하고 비장한 정치참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지금 화물연대도 파업을 하고 있는데, 예전처럼 과격하지 않아요.
빨간 띠 두르고 고속도로를 점거한다든지 그런 게 없어요.
 
정보는 인터넷이나 전화로 다 공유하고 있어요. 비슷한 현상인 거죠.
촛불도 얘기를 들어보면 그래요. 제가 시사프로그램을 하고 있으니까,
사람들 생각을 읽기 위해 인터넷을 자주 봐요.
 
실시간으로 동영상이 흘러나오고 중계가 되고, 관심은 더 증폭되고….
시위 현장에 가지 않더라도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죠.
이런 과정에서 전투경찰이나 정치인을 가깝게 느끼는 것 같아요.
 
패러디의 대상, 놀이의 중심에 두죠. 주체는 개인이에요.
집회를 주도하는 광우병 국민대책위원회가 아무리 해산하라고 해도
주체가 개인이기 때문에 해산하지 않는 거죠.
 
자율적인 움직임이고, 마음이 움직여서 참여했기 때문에,
‘당신들의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주도 세력이 없다는 게 촛불문화제의 중요한 특징인 것 같아요.
정치권과 언론에서도 당황했을 것 같은데요.

김 정말 당황한 사람들은 정부보다 시민운동 하는 분들일 것 같아요.
그런 시위 문화가 없었잖아요.
 
해산하라고 방송하는 경찰한테 “노래해, 노래해” 그러고(웃음).
심각한 일을 심각하지 않게 풀어가는 것 같아요.
 
아줌마들도 그렇죠. 아기들을 앞세우고 나올 때는 애초에 그것을 ‘유모차 부대’라고
하려던 것이 아닐 거예요.
나와 보니 아기 데리고 나온 젊은 엄마들이 있고, 같이 몰고 가다 보니 뒤에 또 있고
그래서 같이 걷고. 그것이 인터넷으로 공개되면서 확대 재생산되고
‘유모차 부대’라는 이름이 붙은 거죠.

‘유머 감각’은 이번 촛불문화제의 괄목할 만한 문화적 성장이라고 생각해요.
물대포를 쏘는 경찰한테 ‘온수! 온수!’를 외쳤죠.
그렇게 많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면, 그 원동력은 뭘까요?

김 언제든지, 어떤 이슈로도 모일 수 있죠. 기자들도 ‘축제’라는 표현을 쓰더라고요.
사람들이 그렇게 즐겁게 시위를 한다고는 하지만 지켜보기는 참….
난 슬픈 축제라고 생각해요.
 
양쪽 입장이 다른데,
인터넷을 통해서 어느 전투경찰 아버지의 이야기를 보면 또 가슴이 아프고
전투경찰이 쓴 이야기도 인터넷에 오르고….
그러니까 정치를 잘했어야죠.
 
시민들이 이런 슬픈 축제에 참여를 하게 됐잖아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해 사람들이 모였지만,
학생들은 학교 생활에 대한 어려움을 말하기도 했어요.
 
‘0교시 부활’이나 사교육 시장에 대한 불안감 등
그런 개개인의 요구들이 마음속에는 있는데 분출을 못하다가 이번에 장이 열린 거죠.
한마디로 멍석이 깔린 거예요.
인터넷과 카메라로 대표되는 디지털 문화가 원동력이 됐죠.
모두가 아나운서가 되고 기자가 되고. 재미도 있죠.

촛불문화제를 계기로 수많은 시민들이 평소에는 걸을 수 없는
광화문 사거리 차도 위를 걸었죠.
‘광장’에서 느끼는 쾌감 내지는 해방감을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김 저는 가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희한하다 이건, 이런 문화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늘 사람들하고 인터뷰를 하면 ‘여기는 축제의 현장 같습니다’
그러는데 이게 축제라면 엄청 슬픈 축제죠.
 
진정한 축제가 아닌데 축제로 받아들이니까.
물 먹는 거 밥 먹는 거 거기서 자기들끼리 돈 걷어가지고 했대요.
경향신문, 한겨레에 광고를 싣는 것도 인터넷 동호회에서 자기들끼리 돈을 걷어서 했다니까.
조·중·동에 대해서는 불매운동도 하고. 그래서 사람의 힘이 가장 무서워요.

시민이 바라는 게 뭔지를 정부가 빨리 캐치하고,
잘못한 게 있으면 ‘죄송하다’고 하고
성실하게 대안을 마련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어땠을까요?

김 시민들은 분명한 요구가 있었고 그게 풀어지지 않아서 인파가 늘었죠.
컨테이너로 막을 것은 아니죠. 하지 말라는 것들은 다 재미있잖아요.
 
막아놓고 가지 말라고 하면 더 가고 싶지.
여기가 부산항도 아니고(웃음). 정말 정치인들이 심리 공부를 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것을 또 ‘명박산성’이라고 이름을 붙였대(웃음).
나는 그냥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그때가 지도자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고 생각해요.
 
이명박 대통령이 나와서 그때 사람들한테 “책임지고 일을 잘할 테니까
한 번만 저를 믿고 따라와주세요” 했으면 최고지(웃음).
 
시민들이 ‘대통령’을 어떻게 하겠어요. 군중심리는 권위를 짓밟을 수 있어요.
짓밟혔고. 하지만 대통령이라는 권위는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미화와 최광기의 대화

최광기가 도착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아이들 좀 보고 오느라”.
최광기는 지난 5월 17일과 24일, 시위 현장에서 사회를 봤다.
 
6월 10일에는 거리에 있었다.
김미화는 방송에서, 최광기는 거리에서 마이크를 잡는다.
두 사람은, 사적으로 만난 자리에서는 “언니, 동생” 하는 사이다.

김 너는 나가봤지? 나가보니까 상황이 어떻디?
최광기(이하 최) 언니는 중계하잖아(웃음).
 
‘변질’을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시작은 쇠고기였지만 정부정책의 방향에 대한 문제로 관심의 폭이 넓어진 거죠.
이 정부를 100일 동안 지켜봤는데 영어몰입교육 나왔지, 0교시 부활 나왔지.
 
그에 대한 비판들이 촉발되면서 여의도로 가고 그런 거죠.
지난 17일에는 학생들이 많이 나와서 너무 놀랐어요.
인터넷으로만 봤는데 실제로도 많이 모였고, 정말 자발적으로 모여서.
말을 어쩜 그렇게 잘해(웃음).

김 ‘놀이 문화’가 또 있어(웃음).
‘촛불소녀’ 캐릭터도 그렇고, ‘고 3도 나왔다’는 문구도 그렇고. 재치가 있어.

최 시민들이 말을 너무 잘해.

김 물어보고 싶은 게 그거야. 많이 당황했을 것 같은데(웃음).

최 너무 당황해서 “나 못 올라가겠다. 어떡해야 하느냐?” 그랬죠(웃음).
저는 광장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좀 두렵더라고요.
언니가 방송에 대한 책임감이 있듯이 저도 책임감을 느꼈어요.

김 내가 볼 때는 이젠 시민들이 “정치인도 싫다” “시민운동 주최도 싫다”
“개개인을 인정해라” 그런 집회인 것 같아.

최 주동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참석한 시민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요.
우왕좌왕하고. 다 좋긴 한데 아직도 저 시민들의 배후에는 뭐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나봐요.
 
1980년대에 그랬거든요. ‘교문 투쟁’ 하고 최루탄 쏘고
학생들은 그걸 보고 ‘저게 정권의 실체’라며 분노하고.
이제 그런 방법은 아니었으면 하죠.

김 염려가 되는 부분이 있죠. 그래서 슬픈 축제인 거고.

최 아직 과도기인 것 같아요.
옛 방식과 새것이 겹쳐서 만나는 과정,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죠.
 
여기서 잘 풀어나가지 않고 월드컵처럼 한시적으로 데워졌다 식으면 안 돼요.
지금은 다를 것 같아요. 시민들도 이게 시작이라고 하고.
나는 이것이 소통의 장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지난 17일 처음 집회에 나갔을 때 그래서 기뻤어요.
이전의 운동권의 분노를 담은 집회는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식이었잖아요.
지금은 세대도, 남녀도, 직업도 없는 자유로운 소통의 장이 마련됐죠.
균형감 있게 갔으면 좋겠어요.
 
의견이 다른 사람 말은 절대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문제죠.
예를 들어 기자가 취재를 하러 왔는데 보수언론이다,
그러면 거기 기자라고 해서 잡아먹으려고 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웃음).
 
그건 매체 전반에 대한 거죠.
물론 그들이 우선 시민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매체가 되어야겠지만요.

김 그것이 군중심리인데. 그래서 저는 사람들 많은데 잘 안 가요.
‘쓰리랑 부부’ 할 때도 큰 경기장에서 공연하고 나오면 사람들이 “쓰리랑 부부다” 하고
와~몰려요. 우리는 사실 싫어하는 사람들이 없었으니까(웃음).
빠져나오질 못하고 아수라장이 되고 다치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사람이 무서워서
“우~” 하는 곳을 못 가는 거야.
 
한편 걱정은 그런 거죠. 전경 아들을 둔 아버지나 어머니가 있다면
촛불 든 여고생 여중생 부모도 있고, 직장인도 있고. 각자 입장이 다르니까
군중심리는 그런 사람들의 입장을 고루 헤아리지 못한다는 거죠.
 
본질을 정확하게 따져야 하는데 하다 보면 마녀사냥이 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 것들이 걱정스러워요.

최 저는 6.10 때도 거리에 나갔는데,
컨테이너 넘어가려고 큰 스티로폼 수백 장을 가져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컨테이너를 넘을 수는 있어도 그 뒤엔 안전장치가 없잖아요.
 
70, 80년대에 거리에서 죽은 사람들 많이 봤어요.
그게 뭔데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가고 목숨을 던질 만큼 중요한 일인가.
가치가 있지만 다치고 그러면 안 되죠. 그래서 거리에 설 때마다 두려움이 있어요.
 
시민들의 자정 능력이 그래서 중요하고, 스티로폼도 그래서 성공하지 못했죠.
지금 한국에는 진정한 보수가 없어요.
 
일부 보수의 탈을 쓴 수구세력이 자꾸 기름칠을 하잖아요.
좀 더 성숙하게 “우리가 잘못했다. 이렇게 풀자” 그래야 하는데.
그냥 덮어씌우기 하잖아요.

김 저만 해도 사람들 무서워서 인터넷 뒤에 숨어서 촛불시위가 어떻게 됐나 봐요.
물론 시사프로그램을 하고 있으니까 이 사안을 중간자적 입장에서 봐야 해서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에요.
 
컨테이너를 치우고 얘기할 수 있는 용기 있는 리더십이 이쯤에서 필요한데, 그게 부족하죠.

 
최 17일에 가서 들었던 구호 중에 와 닿았던 것이
“아침밥 먹고 학교 가고 싶다. 밥 좀 먹고 싶다. 잠 좀 자고 싶다”는 여고생들의 말이었어요.
 
0교시 부활에 대한 분노고
“밥 좀 먹자”는 것은 제대로 된 안전한 밥을 먹자는 것인데 와 닿더라고.
이번 촛불문화제는 일상, 내 삶, 개개인의 문제로 접근하는 거예요.
이제는 내 문제인 거예요. 내가 내 아이를 지켜야 하니까 같이 나오는 거죠.

김 이 문화가 잘 발전이 되면 유럽 선진국처럼 아이들도 공론의 장을 체험할 수 있는
커다란 교육이 될 수 있지만,
자칫 “그냥 우격다짐으로 우리가 이렇게 하니까 되더라”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아이들 교육에도 문제가 있죠. 이것을 잘 끌고 가는 것이 숙제지.

최 촛불은 차갑고 섬세하게 다뤄야 하고 군중심리는 이성적으로 다뤄야 해요.
“청와대로 가자”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100일이든 300일이든 촛불문화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차분하게.

김 저는 참여를 안 해봐서 뭐라고 할 말이 없죠.
(최)광기씨는 절절한 얘기가 나오잖아요. 경험을 해봐야 한다니까.
 
반대하는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거예요.
정운천 장관이 나왔는데 아무 말도 못했다면서요.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도 이런 절절한 경험을 해봐야 한다는 거지.
 
전에 했어야 하는데 찬스를 놓쳤죠.
사랑 고백을 할 때도, 생뚱맞으면 안 먹히잖아요(웃음).
시민들 중에는 현 정부에 대한 기대가 있어서 따끔한 회초리를 든다는 사람이 많아요,

최 국민들이 이 정부에 얼마나 기대를 많이 했어요.
저는 100일 만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정부가 수습하고 정말 반성해서 다시 잘하면 되니까.

김 신뢰를 쌓기가 참 어려운 거예요.
내가 나쁜 짓 하면서 사람들한테 “좋은 일 하세요” 하면 안 먹히듯이
남은 기간 동안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직·간접적인 행동 하나하나에서
얼마나 노력을 하느냐 그거죠.
 
말 한마디의 실수, 행동 하나의 실수를 국민들은 다 지켜보고 있거든.
그런 것들이 신뢰를 무너뜨리면 말이 안 먹히는 거야.
아빠가 아이를 나무랄 때 담배 뻑뻑 피우면서 아들한테 담배 끊으라고 하면
애들도 다 알거든요. 손 냄새 맡아보고(웃음).

최 네티즌이 다 알고 있잖아. 니가 어디서 뭘 했는지(웃음).

김 예전에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얘기를 하고도 “제가 언제요?”라고
안 했다고 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이제는 인터넷에 다 올라와 있으니까.
 
내가 10년 전에 했던 얘기도 나와 있어요.
내가 일관되게 정치 안 한다고 기사에 매번 썼는데 어느 날 정치를 해.
 
“어, 몇 월 며칠 「레이디경향」하고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 했는뎁쇼?”
그러면 내 신뢰는 무너지는 거지(웃음).
 
그러니까 사람들이 일관되게 살기가 어려운 건데,
지금까지 정치인들은 너무나 많은 말 바꾸기가 있었고, 무사통과해왔죠.
 
정보도 언론이 골라 뿌려주는 대로 받았는데
지금은 들어가서 찾아본다는 말이죠.
정보의 바다가 너무나도 넓어진 거죠.

최광기의 비전

김미화가 방송 스케줄로 자리를 뜨고 남은 이야기는 최광기와 둘이 나눴다.
지난 6월 17일의 여의도는 비가 그친 다음에도 흐렸지만,
막 장마가 시작된 날이니까 이상하지는 않았다.
 
촛불문화제가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냈고, 이상하지 않긴 마찬가지다.
성장하는 시민사회의 변화는 6월 말 장마처럼 자연스럽다.
지금은 이 다음을 준비해야 할 때다.

 
 
 
 
 
 
 
 
 
 
 
 
 
 
 
 
거리 공연이나 현장의 유머 감각은 집회를 일견 ‘축제’처럼 보이게도 했죠.
거리엔 분명히 ‘흥’이 있었어요.
축제는 끝나게 마련이지만, 이런 문화는 어떤 방식으로 지속돼야 할까요?

최 축제라기보다 표현이 다양화된 거죠.
전에는 광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이 구호나 노래 정도로 단순했는데
이제는 스스로가 많은 것을 준비해 와요. 소 탈도 만들어오고 연주를 하기도 하고.
 
굉장히 역동적이고 입체적으로 자신들을 표현하고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 발산하니까
마치 축제 같은 느낌이 드는 거죠.
하지만 저는 이것을 축제로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와보지 않고 느껴보지 않고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그걸 일방적으로 해석할 수 있거든요.
 
한편으로 그 비장함을 덜어낸 것은 참 좋은 것 같아요.
비장함이 덜어지니까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해진 거거든요.
그런 의미에서는 놀이 같은 집회가 가능하지만 이것이 ‘축제’로 부각되면 곤란하죠.
 
그리고 참 슬프지. 지금 2008년인데 역사가 뒷걸음질 치는 느낌이 들잖아요.
입시제도가 부활하고 경쟁에 치닫고 국민의 생각과 무관하게 일방적인 의사만 전해지고.
 
참 슬프죠. 그리고 우리가 왜 광장에 모였을 때 진짜 축제다운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가도
고민해봐야 해요.
월드컵 이후에는 뭔가 ‘이슈’를 갖고 모이잖아요.

촛불문화제를 ‘친북좌파의 공작’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도,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고요.

최 길들여진 거죠.
6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이 길들여진 거예요.
어떤 문제가 터지면 그것이 색깔로 가고 이념으로 빠지면서 결국에는
마녀사냥으로 끝을 맺는, 아주 오랫동안 이 사회에 배인 습성이죠.
 
그것이 우리 사회의 비참하고 우울하고 해결해야 할, 청산해야 할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청산된 적이 없어요.
중학생, 고등학생 중에도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많아요. 또 합리적이죠.
 
문제는 원색적으로 날뛰는 사람들이에요.
보수가 아니라 ‘수구 꼴통’이라는 얘기죠(웃음).
 
이 사람들은 보수 진영 내에서도 또 다른 짐이 될 수 있어요.
얼마든지 합리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거잖아요.

어떤 이슈가 터지면 감정이 앞서거나 일종의 세력 다툼
혹은 정치권의 힘겨루기로 몰리는 것도 경계해야 할 일이지 않나요?
이건 싸움이 아니라 대화의 문제인데,
감정싸움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없으니까요.

최 차갑고 냉정하게 짚어나가면서 차근차근 설명해야 하는데.
감정적으로 충돌하면 안 되죠. 개인적으로 싸우는 문제도 아닌데.
 
늘 감정적으로 대항하려고 하니까. “당신 생각은 어때? 들어봅시다” 그게 아니라.
“야, 이 자식아, 넌 왜 그런 말을 해? 태도가 불손한 놈이야.” 이런 식으로 자극을 주니까
얘기를 듣고 싶겠느냐고요(웃음).
 
듣는 사람도 “어쭈, 그럼 너는 뭐가 잘났는데?” 그렇게 나오니까 소통이 안 되는 거예요.
서로 생각이 다른 것에 대해 인정하고 깊이 있게 가야 하는 거죠.

생각이 다르면 대화로 푸는 게 현대의 상식이죠.
지금 한국은 소통에 있어서만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 막 보행기를 잡고 일어나는 아기라는 거죠.
촛불문화제는 ‘변화의 기미’를 느낄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어요.

최 요즘 10대는 뭐든지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당당한 세대죠.
하지만 60대는 소통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고, 50대는 권력에 눌려 산 세대예요.
40대, 30대가 우리 사회에 말문을 트긴 했지만 대화를 하되 정해진 답안지대로 몰아가려는
경향이 있기도 해요(웃음).
 
‘소통’이 머릿속으로만 이상적으로 있었던 세대죠.
2000년 이후 세대는 몸으로 자유롭게 느끼는 세대예요.
말도, 생활도 거침없는 아이들이죠.
우리가 미국에 쫄 이유도 없고. 우리는 미국 사람 만나도 말이 안 되니까 피하는데(웃음).

그래서 지금 촛불문화제를 둘러싼 다양한 목소리와 의견 충돌은
일종의 ‘성장통’이라는 생각을 해요.

최 우리가 경제적으로는 많이 성장했잖아요.
이제는 문화적으로 한 단계 성숙해야 진정한 선진국이 되는 거예요.
 
그동안은 우리가 일종의 졸부였다면, 이제는 경제 규모 세계 12위에 걸맞은
문화시민이 돼야 하는 거죠.
시위에서도, 정치에 있어서도 성숙하게 표현해야 하는 거예요.
성숙한 사람은 함부로 남을 비난하지 않아요.
비판은 할 수 있지만 비난은 하지 않아요. 우리다운 문화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아줌마로서, 주부들은 지금까지 어떤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하세요?

최 항상 문제가 터지면 아줌마들이 해결했어요.
가장이 사고 치고 들어오면 엄마가 나서서 해결했잖아요(웃음).
 
뽀글이 파마에 몸빼 바지 입고 가정을 돌봤잖아요.
많이 배우지도 못한 우리 엄마들이 우리들을 키워냈고,
억척스럽게 돈을 모아서 우리나라를 이렇게 만든 거죠.
아줌마에게 성장의 동력이 있어요. 지금도 서서히 시작됐는지 몰라요.
 
우리 아이의 건강을 위해서 아줌마들이 나섰잖아요.
굉장히 고학력이고, 잠재력과 경험을 갖춘 아줌마들이 우리 사회에 포진해 있어요.
적극적으로 사회에 나서는 거죠.
 
수입 쇠고기 문제, 유가 문제도 직접적으로 바꾸는 겁니다.
지금은 소비자들이 중심에 서는 시대잖아요. 일종의 소비자 운동이죠.
 
보수 언론에 광고하지 말라고 소비자가 들불같이 일어나니까 광고주도 겁을 먹잖아요.
아줌마의 역할이 이렇게 무서워요.
동네에서도 “저 병원이 애들 잘 고친대요” 하면 그 병원은 대박이야.
학원도 그렇고. 손바닥만 한 학원이 소문만 나면 건물 짓잖아요(웃음).
 
아줌마는 소비의 제1선이죠.
유모차를 가지고 나온 30~40대 주부들은 민주주의를 경험한 세대예요.
자기 경력을 위해서 공정하게 시험을 보고 학교에 입학하고 회사에 입사하고,
공정하게 자기 실력을 겨룰 수 있는 사람들이죠.
 
좌절이 있더라도 그런 경험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제 배후에는 아이가 있고, 우리 아이의 배후에는 제가 있어요” 당당하게 말하는 것도 그래요.
옛날에는 카메라를 들이대면 숨고 그랬는데(웃음).
 
이 안에서 우리가 시민들의 정서를 잘 읽고 시민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잘 분석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정치권은 늘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잖아.
정말 차분하고 겸손하게 들어야 할 것 같아요.
 
정치권은 여전히 오만해요.
한나라당도 이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민주당은 민주당대로 돌파구로 이용하는 것 같고.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가를 잘 생각해야죠.

의견이, 혹은 입장이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대화’를 나눌 준비를 하는 과정이었으면 하는데요.
‘소통’이라는 말이 처음 나온 말도 아니고, 상식에 가까운 건데
아직도 이렇게 서투른 건 왜일까요? 이걸 어떤 계기로 삼아야 할까요?

최 지금까지 시도한 소통은 번번이 실패했죠.
참여정부도 ‘토론의 달인’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도 소통이 좌절됐잖아요(웃음).
 
이제는 소통에 대한 욕구가 목까지 찬 거예요. 말하지 않으면 폭발하게 돼 있잖아요.
우리 사회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쌍방의 소통.
 
이런 것들이 이뤄지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성장통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거죠.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현상이고요.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각자가 떠들기만 했는데
자칫 잘못하면 허공에 맴도는 소음이 될 수도 있어요. 이것을 모으는 힘을 길러야 해요.
그런 힘을 갖기 위한 또 다른 성장통이랄까, 혼란을 겪고 있는 거죠.
 
어떤 의미에서 당분간 이 혼란은 계속되지 않을까.
불순한 세력들이 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는 얘기를
아직도 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요(웃음).

사실은 ‘혼란’이 건강한 게 아닌가요?
한국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 얘긴가요?
그게 광장이라는 공간에서 목소리로 표현됐을 때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다면 이 목소리를 내 구미에 맞지 않는다고 꾹 눌러야 하는가.
그건 아니라는 거죠.
합의점을 찾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세요?

최 이번 촛불문화제가 혼란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계기가 됐으면 해요.
21세기는 다문화사회고, 그 실체가 끊임없이 분출될 거라는 말이죠.
외국인도 촛불을 들고 전경의 아버지도 촛불을 들고 장애인도 들고.
 
사회 구성원의 다양성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잖아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서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통합과 조정을 거치는 능력이 요구되는 시점이에요.
 
대통령도 정계 원로만 만나지 말고,
10대도 만나보고 대통령에 반대하는 사람도 만나보고 했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자기 리더십을 훈련할 수 있는 계기였으면 좋겠고요.
사실 이명박 대통령은 운이 좋은 사람일 수도 있고,
이 무거운 사회의 리더가 돼서 힘들 수도 있어요. 다양한 목소리를 조정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잘만 해주신다면, 국민들은 대통령을 다시 평가할 수 있으니까.
찍었지만 아니라면 혼도 낼 수 있고, 또 잘하면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좋죠.

우리는 ‘개인’이 전면에 나섰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와중에도 한 보수 논객은 “촛불 뒤에는 하나로 묶을 수 없는, 생각할 필요가 있다.
보다 더욱 정교한 배후가 있을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소설가 이문열씨는 촛불 집회를 ‘내란’으로 보고
“지금은 촛불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이 일어나야 할 때”라고 했다.

나가보면 알겠지만, 촛불을 든 사람들이 싸우자고 모인 것은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들어주는 사람은 없으니까 굳이 나선 곳이 거리다.
 
광장에서 울려 퍼진 구호들은 이미 나라 곳곳에 멀리 퍼졌다.
유머 감각과 새로운 문화도 함께 퍼졌다.
 
이게 일시적이고 일방적인 ‘토로’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양쪽이 움직여야 한다.
귀를 열고, 대답을 해야 한다. 대화는 종종 이런 식으로 시작되기도 한다.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원상희,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