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막사발이 아니라 사발이다 / 신한균

기산(箕山) 2007. 6. 21. 04:33





500년 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우리의 각 지방에는 그 지방의 토속미를 가진 정겨운 사발과
사발보다 조금 작은 보시기가 있었다.

이것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귀한 차사발이 되어
현재 일본의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허나 우리나라에서는 이것들을 전부 ‘막사발’이라 부르는 사람이 많다.
막사발은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옛 사발은 그냥 조선 사발, 고려 사발,
요새 것은 막사발이 아니라 사발이라 해야 한다.
‘막사발’ 그 말의 연유를 찾아보았다.

1920년대,
새롭게 밀려온 산업 도자기인 왜사기가
우리의 전통이었던 백자의 숨통을 끊어 버리고
우리나라 도자기 시장을 완전 석권하기 시작했다.

그때 시골에 값싼 우리의 막사기가 있었다.
막사기는 흙으로 만든 장작 가마,
간단히 구할 수 있는 원료,
간단한 도자기 기술,
사람 서너 명만 있으면 움막에서 쉽게 빚을 수 있는 사발이었다.

값도 저렴했다. 많이 만들 수 있었다.
시골에서는 흔한 그릇이라며 이것을 막사기라 불렀다.

도시에서 왜사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이 막사기를 막사발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도자기의 순수한 우리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기장이 도공이 되고 사기그릇을 자기라 부르며,
사금파리는 도편으로 가마는 요라 불러야 유식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 말을 찾아보자.
동이보다 작은 그릇은 방구리,
작고 예쁜 여자 밥그릇을 ‘옴파리’라 불렀고
동물이나 새의 이름을 딴 거위병, 오리병, 두리미병, 자라병,
또 병의 목이 좀 두툼하게 올라와서 볼품없이 생긴 병을 멍텅구리라 불렀다.

박물관에서 오랫동안 우리 옛 도자기를 연구한 사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이조백자라는 말을 조선 백자로 바꾸는데 20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 도자기 말을 찾지 않는다면
우리 도자기의 말은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도예가 신한균
<우리 사발 이야기>의 저자이자 회령 유약을 국내 최초로 재현한 신한균님은 일본 등 국내외에서 100여차례의 개인전을 열었고, 한국 공예 대전에서 동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우리 도자기에 묻어 있는 일본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우리 옛그릇 이름 되찾기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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