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이 시대를 담아내기 위한 한국화 전공자들의 실험은 소재, 표현 기법의 연구를 넘어선다.
작가 특유의 브랜드를 창출하는 한편, 다른 예술 장르와의 만남을 통해 메시지와 이미지를 확장시킨다.
‘보리밭 그림’으로 대중적으로도 인기 높은 이숙자(65)씨,
그리고 영화·문학 등 다른 장르와의 협업을 시도해온 김선두(48)씨.
두 화가가 한지 수묵채색화의 실험과 도전이 돋보이는 개인전을 연다.
◆ ‘보리밭 화가’ 이숙자씨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밭 풍경 속으로 녹색뿐 아니라 알알이 톡 불거져 보이는 보리에는
희거나 노란색 외에 연보라, 빨간색도 스며있다.
나비가 날아드는 보리밭 위로 큰 눈, 잘록한 허리에 전사처럼 당당해 보이는
알몸 여성이 어깨를 편 채 위쪽을 응시한다(그림 위).
‘보리밭 화가’ 이숙자씨의 신작전이 5월12일까지 서울 선화랑에서 열린다.
물결치듯 일렁이는 청맥, 황맥에 달개비, 나비 등이 더해진 보리밭 풍경과 더불어
대담한 여성누드와 접목한 ‘이브의 보리밭’시리즈를 발표한다.
1977, 78년 청맥과 황맥 그림으로 연달아 국전에 입선했던 가냘픈 이미지의 여성화가.
손을 대보고 싶을 만큼 통통한 보리알 위주의 초기작부터 세필로 일일이 그려넣은 보리수염의
선이 돋보이던 보리밭 풍경 속으로 ‘왠지 서글픈’ 보리밭의 정서를 담아낸 지 30년.
그는 “보리알은 만삭인 아내를 바라보듯 대견함이나 생명의 경이가 느껴진다”며
“그 오묘한 보리밭 풍경을 혼자만 보기 안타까워 그림에 담아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초기엔 ‘잘생긴 남자가 왕관을 쓴 모습 같은’ 황맥을 꼼꼼하게 묘사하느라 보리알의 표현에
집중한 나머지 수염이 뿔처럼 도드라졌지만 이즈음 투명하게 색이 빛나는 석채 등
물감 선택과 표현 기법의 개발로 보리밭 정경이 한결 풍요로워졌다.
올해 고려대 교수직을 정년퇴임하는 이씨는 원로화가 천경자씨의 제자.
70년대부터 여성누드를 그렸으며, 90년쯤 보리밭과 접목을 시도한 이브시리즈를 선보였다.
보리밭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네킹 같은 인조미인을 현대의 상징이자 남성 중심의 세상에
맞서는 전사처럼 당당한 알몸의 여체로 등장시켰고,
결국 보리밭과 결합된 ‘보리밭의 이브’가 탄생했다.
이번 전시회에 선보이는 1989년작 이브시리즈 첫 작품은 원래 푸른색 보리밭이었으나
20년 세월을 지나면서 흰색, 연보라색 수염이 더해지며 색 스펙트럼이 다양해졌다.
◆ 문학·영화와 만나는 김선두씨
동향(전남 장흥)의 문인 이청준 김영남씨와 함께하며,
문학과 미술의 만남을 지속적으로 펼쳐온 김선두씨는 영화 ‘취화선’속 장승업 그림의 화가.
김씨는 24일까지 서울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모든 길이 노래더라’전에서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을 촬영한 광양 매화마을에서 진도 관매도에 이르는 남도 길을
전통 장지에 담아낸다.
화가는 보성, 장흥, 강진, 완도, 해남의 자연에 사람과 동물이 더해진 풍경을 통해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같은 제목의 화문집 ‘모든 길이 노래더라’의 출판기념전이며,
500호 크기 2점 외에 100호 이상 등 대작을 주로 선보인다.
“다른 장르와 만나는 가운데 화가로서 세상 읽기의 또 다른 시각을 갖게 됩니다.”
‘행(行)’시리즈를 발표해온 김씨는 수묵채색화 속에 유독 굽이굽이 곡선이 도드라지는
길 위주의 풍경을 선보인다.
세 남녀가 등짐을 둘러멘 채 걸어가는 ‘소릿길’(그림 아래) 등 ‘천년학’‘서편제’ 등의
영화 장면뿐 아니라 감독이 털어놓은 영화 에피소드까지 그림 속으로 끌어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