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민족사의 맥을 찾아서

기산(箕山) 2007. 3. 5. 02:35

 

< 민족사의 맥을 찾아서 - II >

 

 

 

11. 천 제

삼신에게 제사지내는 때는 개천절인 10월 3일로, 지금은 이것이 양력으로 되어있습니다.

옛날에는 음력으로 10월 3일이었습니다.

10월달은 상달이라고도 하는데, 그 때는 그날부터 정월 초하루로 해가 바뀝니다.

왜냐 하면 농사가 끝났으니까, 추수가 끝났으니까 이제 해를 바꿔 버립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 년월이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애당초에는 10월 3일이 1월 1일이었습니다.

정월 초하루를 설날이라고 하죠.

그런데 지금은 카렌더가 바뀌는 바람에 삼신제사를 개천절에도 하고 설날에도 하는 등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원래는 음력 10월 3일인 설날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대관령에 가 보시면 알겠지만 대관령 산신제가 있습니다.

강릉 단오제가 있기 한달 전쯤 대관령 산신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한번 답사를 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거기 가 보면 외국사람이 더 많아요.

우리 한국사람들은 구경도 하지 않습니다.

외국사람들 중에서도 일본사람들이 특히 많습니다.

그들은 무비로 찍고 그러는데 외로이 저 혼자 가니까 부끄러운 생각이 들더군요.

여하튼 이것이 바로 하늘에 제사지내는 원형입니다.

거기서 보면 먼저 신단수의 나무가지를 자릅니다. 잘라서 옷을 입힙니다.

옷을 입혀 그걸 모시고 강릉까지 갑니다.

옛날에는 강릉까지 가는데 중간 중간에 당집이 있어서 쉬어 가곤 했었지만,

요새는 트럭에 싣고 그날로 내려가 버립니다.

아직도 중간 중간에 그 당집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옷을 입은 그 분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남성이냐 여성이냐, 남성입니다. 환웅입니다. 바로 환웅이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환웅을 맞이하는 강릉의 당집에는 누가 있는가 하면, 웅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환웅으로 대변되는 그 나무를 강릉의 당집에 집어 넣는 때가 바로 결혼 첫날밤이 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대축제가 벌어집니다. 농악이나 사물놀이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다 끝난 뒤에 강릉 단오제를 하는데,

바로 그곳에서 고조선 때 했었던 천제행사가 벌어집니다.

이 천제행사에서는 단지 절하는 것뿐만 아니라 축제도 벌어지는데,

이 축제에서도 단순히 춤추는 것 외에 스포츠를 했습니다.

이 스포츠를 이름하여 국중대회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대 올림픽입니다.


12. 국중대회

88서울올림픽을 개최할 때 제가 강력히 주장한 것이 있습니다.

"현대의 올림픽은 오랑캐 풍습이지만, 우리에게도 원래 올림픽이 있었다"라고

이것을 강조했지만, 한 사람도 끄떡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무슨 올림픽을 했겠소?"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국중대회에서는 백기를 겨뤘다고 했기 때문에 백가지 경기종목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 달리기, 요즘말로 마라톤이죠, 이 마라톤의 거리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이 달리기에서 일등을 하면 최고의 국사(國士)가 되었습니다.

나라의 최고 선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국사봉이라고 합니다.

국사봉은 그 나라에서 존경받을만한 사람을 지칭합니다. 말하자면 '님'입니다.

영어로 말하자면 엘리트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이 국사가 나라를 지킵니다.

어떤 외침이 있으면 이 사람들이 나라를 지키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써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실력을 발휘하는가를

이 국중대회의 경기종목에 따라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국중대회에서 개발된 노하우(Knowhow)중 축지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때 태백산 아래에서 축지법을 배우고 장생했다는 김 모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은 이백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의 유일한 제자가 권 선비인데, 이 권 선비는 저의 고향인 무주 구천동 적상성이라는

산성에서 수도를 하여 오백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고려 초에 태어나서 조선 초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서 제자를 두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함석헌, 최남선의 선생이 유영목이라는 분인데,

이 분은 축지법을 쓰셨고 세검정에 살다가 1984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최근까지 축지법의 노하우가 부분적으로 계승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아마 축지법 쓰시는 분이 없을 겁니다.

또 있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공업발전에 지대한 악영향을 줍니다.

전부 축지법만 쓰면 자동차가 필요없게 되잖아요.

이렇게 되면 곤란하기 때문에 축지법은 제발 없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달리기 외에 스포츠의 또 하나로 국궁이 있습니다.

옛부터 중국은 창을 잘 쓰고, 일본은 칼을 잘 쓴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활을 잘 썼습니다.

그래서 임진란이 끝나고 통신사가 일본으로 갈 땐 반드시 큰 군용활을 들고 갔습니다.

그래서 사무라이들한테 그 활을 내놓고 쏴 보라고 주면,

힘깨나 쓴다는 사무라이들이 아무리 잡아 당겨도 잘 되지 않거든요.

그래서 우리 장사가 그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1km정도 날아 가더라고 합니다.

사정거리가 1000m인 셈입니다.

그래서 사무라이들이 입을 딱 벌리며 놀라면서, "이걸로 뭘 잡습니까?" 하고

물으니 답하기를, "백두산 호랑이를 잡는다"라고 하더랍니다.

그처럼 우리 활의 전통이 옛부터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마을마다 있는 정자는 술먹고 풍류을 읊는 자리가 아니라 사실은 활쏘는 사정(射亭)이었습니다.

서울에도 사정이 많았습니다.

경희궁터에 황학정이 있습니다.

왜 황학이라고 했는가 하면, 마지왕 황제인 순종이 거기서 주일마다 와서 활을 쏜 곳이어서

그랬다고 합니다.

오늘날 이 국궁의 전통이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한산도에서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식 참석 얘기를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대통령이 한산도에 가면 반드시 활을 쏘게 되어있다고 합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활을 쏠 때 거꾸로 잡고 쏘려 했다고 합니다.

그 때 경호원이 그걸 보고서 그대로 두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아서,

"아이구! 각하, 반대입니다"하며 급히 말린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후 박대통령은 이것이 아주 챙피스러워서 청와대에 들어와 활연습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사실 청와대 있는 곳이 경무대입니다. 거기서 무과시험을 보았습니다.

무과시험에서 10m전방의 과녁에 다섯발 중 세발을 맞춰야 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발 맞추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시험문제를 요즘 대입시험문제 쉽게 내듯이 두발만 맞추기로 고쳤답니다.

그랬더니 한번 시험보면 합격자가 만명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를 만과라고 합니다.

영조 땐가 숙종 땐가 생긴 일입니다.

만과가 되어 직장이 없다시피한 합격자들은 활 쏘러 떼를 지어 활터에 가서

술 마시며 노래나 불렀습니다.

여기서 흔히 말하는 한량이 생겼습니다. 한량의 선조는 화랑입니다.

아까 삼랑을 말했는데 여기서 랑자 붙는 사람은 국사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국궁의 옛전통도 역시 단맥(斷脈)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3. 우리나라 무술

태권도를 살펴 본다면,

태권도는 일본에 건너간 우리 무술이 역수입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우리의 무술은 택견이라 해서, 중국에서 말하는 쿵후처럼 손바닥을 어떻게 하면

거기서 연기가 팍 나는 것처럼 무서운 무술이었습니다.

이 택견이 국중대회에서 벌어졌을 때는 참 무서웠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예컨대 여기서 손가락으로 어떻게 하면 10m전방에 있는 적의 눈이 쏙 빠졌습니다.

손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단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산 동래에 범어사라는 절이 있죠.

거기에 무서운 무술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다고 해서 소문이 났습니다.

그래서 부산에서 유명한 깡패 일곱명이, 범어사의 무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대결해 보려고

범어사를 찾았다고 합니다.

가서 "누구요! 나오시오. 여기서 한번 손좀 봐 주겠다"하니까,

안에서 나오시는 분이 칠십노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서 왔소" 하니까, "우린 부산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인데 우리보다 낫다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그 사람이 당신이요?" 거기에 답한 즉, "그래 나다.

내가 자네들 일곱명을 상대해서 한꺼번에 물리칠 수 있지만 가련하게 생각되어서

지금 내가 여기서 하는 것을 따라서 할 수 있다면 응해 주겠다."

그래서 "뭔대요" 하니까, 그 노인이 손가락을 땅에 짚고 물구나무를 서는 것이 아니라

몸을 수평으로 놓아 오분동안 까딱 않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고 일곱명은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 후 다시는 거기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후 그 분의 노하우를 서울에 사는 김 모라는 사람이 알아서 그 노승을 찾아 갔습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계승을 하겠습니다.

절 좀 가르쳐 주십시요"하며 늘어 붙었어요.

노승이 그에 대해 "너 시키는대로 하겠냐?"하고 물으니까, 하겠다 해서

그 후 3년동안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고 양동이에 물만 떠오도록 시켰다고 합니다.

그것만 실컷 나르다가 서울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래도 뭘 배워서 지금 뭘 한데요.

제가 생각하기에 노승이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은 이유는, 기술이라 할 때의 술처럼 술(術)로

빠지면 안된다 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목숨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로서 배워야지,

술로서 배우는 그러한 아이들에게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후에도 그런 제자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선비처럼 하나에서 열까지 인격적으로 완전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해서 전수를 못한 것입니다.

이 노인장의 예를 보아서, 그렇다면 국중대회에서 오늘날 20세기까지 내려오는 택견의 맥이

아직도 어디엔가는 살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14.  치우천황

치우천황은 한국의 알렉산더라고 할 수 있는 분입니다.

기록에는 이 분이 미사일를 가지고 중국을 정벌했다고 합니다.

또 이 분이 적군과 싸움을 할 때는 김포공항에 안개가 끼는 것처럼 안개를 피워서

적이 정신을 못차리도록 하는 연막전술을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측에서는 치우라고 하면 무서운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침략자로 알고 있습니다.

치우가 온다고 하면 울던 어린이도 울음을 그쳤다는 말도 있습니다.

치우천황은 우리 역사에는 등재되지 않고 있지만 바로 우리의 군신(軍神), 병신(兵神)입니다.

대관령에 있는 당집에 가 보시면 소위 삼국통일을 했다는,

말타고 있는 모양의 김유신을 모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김유신은 무신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이 무신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 무강한 민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치우천황은 회대지방(淮垈地方),

즉 산동반도와 회수(淮水)와의 사이까지 정복해 들어갔다고 합니다.

산동반도와 황해도는 대단히 가깝습니다.

예전에 백두산에 갔을 때, 지금의 산동사람들이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닦고 있었어요.

아주 가난하기 짝이 없어 보였는데 당시 조선족 가이드가 저 사람들은 산동사람이라고,

저 사람들이 우리 조선족 돈 가져간다고 해서 알았습니다. 한달에 얼마씩 받는가 물어 보니

150원씩 받는다고 해요. 150원이면 우리돈으로 15,000원입니다.

바로 이 산동사람들이 고조선 때 바다를 건너서 황해도로 오지 못했던 잔류민족입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산동사투리가 가장 심하다고 합니다.

중국의 다른 지방 사람들은 산동사람들이 중국말을 잘 못한다고 말합니다.

언어에서 보더라도 그렇고 또 공자가 산동사람이어서 공자까지도 중국인이 아닌

동이족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실제 공자는 동이에서 배웠다고 합니다. 동이에서 배운 것을 집대성한 이가 바로 공자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산동의 노나라 사람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여튼 그가 누구든 간에 중요한 것은 그가 집대성한 문화는 동이문화요,

고조선의 문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학 그 자체를 중국산으로 보지 말고,

우리 조상의 문화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까 제가 국궁에 대해 얘기했는데, 이 국궁은 원래 단궁(檀弓)이었습니다.

이 단궁이 맥궁(貊弓)으로 되고, 그 다음에 국궁(國弓)으로 된 것입니다.

이 단궁이라는 말에 왜 단자가 붙는가 하면, 단군이 개발한 활이어서 그렇습니다.

이 단궁은 나무 중에 가장 딱딱한 박달나무로 만든다고 합니다.


15. 하루방에 스며있는 치우의 미소와 한국부처의 미소 

치우장군의 얼굴을 어디서 볼 수 있는가 하면, 우리 한옥의 와당(瓦當)에 도깨비상이 있습니다.

일명 치우상입니다. 이빨이 드러나고 눈을 부릅 뜨고있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악귀를 치우가 막아준다고 해서 그렇게 기와에 새겨놓은 것입니다.

또 저는 제주도에 있는 하루방을 치우라고 생각합니다.

신혼부부들이 제주도에 신혼여행가서 선물로 사오는 하루방은 가짜배기입니다.

원래의 진짜 하루방이 있습니다.

제주도에 가면 관덕정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관덕정 옆에 하루방 두개가 서 있고, 그리고 삼성혈(三聖穴) 입구에 하루방이 서 있습니다.

이 하루방이 바로 오리지날 하루방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하루방의 얼굴을 사진도 찍고 또 면밀히 관찰했습니다.

한국인의 원래 얼굴은 미소짓는 부처의 얼굴인가,

아니면 하루방 치우상의 얼굴인가 하면서 관찰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성과 관계있습니다.

부처님 얼굴의 미소는 레오나르도다빈치 작품의 모나리자의 미소를 능가하는

세계의 으뜸가는 미소입니다. 이런 미소는 절대 조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저기 대흥사 뒤에 있는 바위에 새겨놓은 부처가 있습니다.

새벽에 초를 가지고 가서 불을 켜 놓고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면, 부처가 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해가 떠올라 태양빛을 받으면, 그것이 미소로 변합니다.

이 작품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주 세계적인 명작입니다.

서양의 미소 전문가가 와서 놀랬습니다.

이렇게 울고 웃는 것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세계 어디에 가도 볼 수가 없다고 하면서

놀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나리자 미소에 대해 물으니까,

모나리자 미소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물어보니,

모나리자의 미소는 그 여자가 공동묘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씩 웃은 미소인데,

그 공동묘지에 자기 남편을 묻었다고 합니다.

음탕한 여자의 그런 마음 속에서 나온 미소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한다면 한국부처의 미소는 굉장한 걸작인 것입니다.

일본부처를 보면 사람 잡아먹을 것 같은, 살인마 같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신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면 중국의 부처는 어떤가, 중국의 부처는 뭔가 나사가 빠진 것같이 멍해 가지고

이건 도무지 거기다가 절할 맛이 나지 않습니다.

한국 부처의 얼굴이 제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성 속에 그런 미소의 얼굴이 있고, 또 하나 무서운 치우의 얼굴이 있습니다.

이것은 노한 한국인 얼굴입니다.

항상 웃고 순종하는 것 같아도 어느 때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침략자에게 저항하는

그러한 면을 우리는 치우상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에 들어가면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사천왕문(四天王門)에 들어섭니다.

이것은 어느 절에 가도 공식화되어있습니다.

사천왕은 바로 대웅전 부처님을 지키는 문지기입니다.

저기 해인사에 가 보시면, 해인사에 들어가는 첫문이 일주문인데,

그 일주문 앞에 천하대장군상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지하여장군상은 지금은 부서져서 없습니다.

왜 이걸 세워 놓았는가 궁금했었는데, 이것이야말로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곳에 어떤 절이 있었지 않았나,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어떤 신사가 있었지 않았나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대를 답사해 보았더니, 불교유적은 없고 전부 단군유적들만 쭉 있었습니다.

이 단군유적에 둘러 싸여있는 불교유적을 발견하고서, 과연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아주 여러번 투쟁을 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16.  달아매기 

우리 민족성이 무강하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가 달아매기입니다.

옛날에 장가들게 되면 먼저 신랑이 신부집에 조랑말을 타고 갑니다.

그리고 신부를 모셔 오는데 그보다 먼저 동네총각들에게 실컷 매를 맞습니다.

왜 맞을까요? 그 동네 아가씨를 훔쳐가기 때문에 거기서 매를 맞아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옛날에 약탈혼인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어느날 밤 중에 마을 총각들이 사냥하러 갑니다. 다른 동네에 가서 처녀를 납치해 오는 겁니다.

어떤 때는 잘못해서 남의 유부녀를 납치를 해올 때가 있어서 돌려 보내기도 하는데,

그렇게 해서 사실상 결혼을 해놓고 난 뒤에 그 동네에 가는 겁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죽을 죄를 졌습니다." 이러면 동네 총각들이 달아매고 "야 이놈아,

왜 남의 동네 처녀를 도둑질해 가느냐"하고 달아매고 패는 것입니다.

이 달아매기 유습은 어떻게 보면 야만적인 것 같은데,

옛날 우리의 결혼풍습을 말해 주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결혼식을 예식장에서 하고 말지만,

우리는 원래 신부집에 가서 먼저 예를 올리게 되어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우리 문화의 원형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17. 군악(軍樂)

우리에게는 농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은 농악이지만 옛날에는 군악(軍樂)이었습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하죠.

지금은 그렇지만 옛날에는 병자천하지대본(兵者天下之大本)이라고 했습니다.

군인이 천하지대본이라는 그러한 깃발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평화로운 시대가 되니까 글자가 바뀌어 농자로 된 것입니다.

지금의 농악은 농민들이 하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사실은 군모를 쓰고 군복을 입었습니다.

붉은띠가 군복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군악내용도 적진을 향해서 돌격하는 그 장면입니다.

처음에는 천천히 하다가 적군이 가까워지면 그 때는 빨리,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려갑니다.

한국사람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 였습니다.

외국사람들이 계산해서 되지 않는 걸 한국사람들이 가서 한답니다.

일본사람들이 저거 장사 안될텐데 하는 것도 한국사람들이 가서 수지까지 맞아서 온답니다.

이것을 '죽기 아니면 살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선비정신의 제일로 생각했습니다.

성패불수, 그러니까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불문하고 해야할 것은 해야 한다는 그 정신,

이것이 선비정신으로서 조선시대 때 문약에 빠진 500년동안에도

우리 한국 남성의 이상상(理想像)으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18. 다 물

우리 민족에게는 다물정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다물정신이라는 것은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이 다물은 중국말로 하면 뜻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만리강역을 되찾아야겠다는 그러한 정신입니다.

한자로 바꾸면 광복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려고 하는, 미국으로 말하면 서부개척정신이 바로 다물정신입니다.

이 다물정신은 우리 민족의 속성입니다.

민족성에는 변성(變性)과 항성(恒性)이 있다고 단재선생이 말했습니다.

항상 변하지 않는 불변의 민족성이 있고, 시대에 따라서 변하는 민족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불변의 민족성과 시대에 따라 변하는 민족성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역사학자들은 항상 변하는 것만 연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한국사람들 어떻게 변해 있습니까? 얼빠진 상태로 정신이 나가버렸습니다.

외래문화에 흠뻑 젖어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빵을 먹고 있습니다.

잠은 침대에서 자면 안됩니다. 온돌방에서 자야 돼요.

우리 민족문화의 마지막 보루가 온돌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 텔레비젼 광고를 보니까 침대광고가 막 나오더군요.

'이제 온돌방도 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이제 남은 게 뭐가 있느냐, 김치정도인데 이 김치도 맵다고 해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의식주 중 의는 사라진 때가 이미 오래이고, 식도 가고, 주도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연구할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연구해야 하는 것은 불변의 것,

침대 연구할 것이 아니라 온돌방 연구를 해야 합니다.

 

 

19. 연개소문의 김해병법

이러한 우리 민족의 다물정신을 구현한 인물로서 잘못 오기된 분이 연개소문입니다.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쿠테타를 일으켰다고 해서 나쁘게 기술이 되어있습니다.

<삼국사기>를 적은 김부식이 그랬습니다.

연개소문은 당태종과 맞붙어서 안시성에서 그를 대패시켰습니다.

그런데 당시 당나라 군사의 총사령관이 바로 당태종이었는데,

웬만하면 당태종은 그냥 자기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직접 친정에 나섰어요.

자기가 친정에 나서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당나라에는 이정(李靖)이라는 유명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당태종이 이정 장군에게 고구려를 치는데 지휘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정은 '우리 선생님의 나라여서 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정은 연개소문에게 병술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손자병법은 알아도 김해병법은 잘 모를 겁니다.

김해병법이라는 우리 고유의 병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이 김해병법서를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 낼려고 대만에 갔습니다.

대만의 모서점에서 이정병법이라는 책을 찾았습니다.

이 병법은 이정이 당태종에게 가르친 병법으로서 그렇게 길진 않습니다.

'고구려를 칠 때는 요렇게 요렇게 해서 싸우시오'라고 유의사항을 적어놓은 것입니다.

이정이 연개소문에게서 김해병법을 배웠기 때문에 고구려의 병법을 잘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연개소문의 호는 김해입니다. 그래서 김해병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찾으면 있을 것 같지만, 이 책은 현재로서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단면이라도 보고자 이정병법을 대만에 가서 샀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문화종속주의에 빠져 있는가 하는 것을,

중국의 손자병법은 알면서 우리의 김해병법은 모른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계획은 이 이정병법서를 연구해서 우리나라 고유의,

단군조선 때부터 내려오는 병법을 저술할려고 합니다.

제가 못하면 여러분 중의 한 분이 하시기 바랍니다.

대만에 가면 경극이라는 오페라에 연개소문이 등장합니다.

연개소문의 가면은 무시무시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연개소문의 허리에는 다섯개의 칼이 꽂혀 있습니다.

다섯개의 칼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는 검법이 전수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연개소문은 칼 다섯개를 썼습니다.

일본인은 짧은 것과 긴 것 두개를 찹니다.

싸움이 나면 일본 사무라이는 먼저 긴 것을 뽑아서 쓰고, 그것이 부러지면 작은 걸로 합니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칼 다섯개를 어떻게 썼는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특유한 병법과 검술을 가지고 당태종의 대군을 안시성에서 무찔렀을뿐만 아니라

패퇴하는 당나라 군대를 몰살시키고 요하를 건넜습니다.

요하를 건너면 바로 북경입니다.

그래서 연개소문이 북경을 점령해서 고려진을 거기다가 설치했다는 사실은 절대로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려진이 많아요. 지금도 고려진이 많습니다.

당시 고구려인이 쏜 화살이 당태종의 왼쪽눈을 명중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20m전방에 엽전을 놓고 엽전의 구멍을 맞추는 그러한

사격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옛날 고구려 병사들이 쏘는 활은 권총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태종은 당시 왼쪽눈을 맞아 돌아가며, "왜 내가 고구려 같은 작은 나라를 정복하는데 직접 가서

이런 수모를 당하느냐"는 얘기를 하면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곤 3년 뒤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화살촉 끝의 청석이라는 돌은 철판을 뚫는다고 합니다.

그것이 적함에 명중되면 격침까지 된다고 합니다. 그러한 무서한 대궁입니다.

대궁에서 소궁까지 온갖 무서운 활을 개발했는데,

이 때 당태종은 적은 것에 맞아서 3년 뒤에 저승으로 갔습니다.

당태종은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우리의 세종대왕 같은 분입니다.

그런데 고구려인의 화살촉에 맞아서 죽었다고 하면 그의 위상에 문제가 생기니까

설사로 죽었다, 독감으로 죽었다 등 당서에 보면 온갖 엉터리 얘기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인(死因)이 분명치 않게 기록되어있습니다.


20. 사기(士氣)

우리가 이렇게 한국사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할 때에 역사교육을 하면 거기서

국민의 사기(士氣)가 오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때 학자들은 이기론(理氣論)으로 논쟁을 많이 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중요문제 때문에 서로 완전히 갈라져 버렸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퇴계와 율곡, 지금까지도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기(氣)가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선비에게는 기가 죽으면 안됩니다.

우리나라 교육의 전통은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는 원칙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기를 때에는 '반드시 엄하게 기르라 그러나 기를 죽이지 말라'는 것이

교육의 대법칙입니다. 아이의 기를 죽이면 안됩니다.

아이의 기를 죽이지 않는 정도에서 엄하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지금 엄하게 기릅니까?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가정교육이나 학교교육에서 무언가 잘못된 교육을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역사공부를 하다 보면 무언가 기운이 나고 우리나라에 태어난 것을 아주 행복하게 생각하게 되는,

그런 사기가 오르는 교육을 해야 됩니다.

사기를 죽이는 역사교육은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의 한국사는 반도강역론, 단군신화론, 민족문약론, 민족니나노(노는것)론 같은

이런 나쁜 것에서 우리의 민족성이 나오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장 증오하는 것은 민족한문화론(民族恨文化論)입니다.

우리 민족문화의 본질이 한(恨)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그렇게 한(恨)이 좋으면 대한민국의 이름을 한(恨)으로 고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한에 맺혀 있어서, 우리의 모든 문화예술 속에 한이 들어있다는 엉터리 얘기를

일본인들이 했습니다.

일본인들이 우리의 기를 죽이기 위해서 이 한론을 주장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선백자를 완전히 쓸어서 모은 유종렬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광화문 헐 때에 반대한 사람이 유종렬입니다.

유종렬에겐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대가 끊겼습니다.

유종렬의 아들이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를 왜 한국사람들은 욕을 하느냐?"하는데,

유종렬 그가 백자의 백색을 한이라고 풀이했습니다.

눈물이라고 평한 사람이 바로 유종렬입니다.

유종렬은 임진난 때 도공으로 끌려간 사람의 후손입니다.

그는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의 이 백색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모 기자와 인터뷰하는 기회가 있어서, 그 때 내가 물어 보았습니다.

"우리 연구실에 백자가 하나 있습니다. 진짜백자는 아니지만 이 백색에서 눈물이 발견됩니까?"

하니까, "눈물은 커녕 백색은 색 중에서 가장 고귀한 색깔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종렬이라는 사람이 이 백색을 한맺힌 민족의 눈물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현재 그 유종렬의 한(恨)철학을 계승해서 김 모 교수가 주장하다 보니까 TV고 신문이고 온통

우리 민족문화를 한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한(恨)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미움, 증오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민족은 남을 증오하고 서로 화합할 줄 모르고 망해도 마땅한 종족이라는

일제식민주의 철학이 한(恨) 속에 들어 있습니다.

김동길씨도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 한국문화를 비판할 때 사용하는 준거는 미제잣대입니다.

미국에 빗대서 대통령은 링컨대통령을 말하는데,

왜 우리나라의 옛날 임금님을 가지고 얘기 못하는가 말입니다.

오늘의 한국문화와 한국인을 비판함에 있어서, 왜 미국문화와 미국인의 기준에서

한국인을 비판하느냐 말입니다.

한국에는 팔등신이 없습니다. 팔등신 미인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칠등신 미인밖에 나올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칠등신 미인을 뽑자는 겁니다.

그래서 세계대회에서 떨어져도 괜찮다 이겁니다.

광대뼈 많이 나온 여자, 이게 한국 여자이기 때문에 떨어져도 좋다 이겁니다.

가장 표준 한국인에 맞는 미남과 미녀를 뽑아야 합니다.

우리의 비판의 척도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우리 것으로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이런 것이 앞으로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21. 민족사는 '민족'의 역사

민족사란 민족의 역사입니다. 민족사는 국가의 역사도 아니고, 민중의 역사도 아닙니다.

고통받는 민족의 역사이어야 합니다. 고통받는 민중의 역사, 계급의 역사여서는 안됩니다.

민중론에서 얘기하는 삼민주의(三民主義), 이것으로써 민족사를 보아서는 안됩니다.

얼마 전에 소련에서 민족주의가 대두되어서 공산주의가 무너졌을 때

죠지윌이라는 컬럼니스트의 글을 보니까,

미국의 대외정책의 기본은 민족주의 억제라고 했습니다. '각개 민족주의는 반민주주의다' 해서

각개 민족주의를 탄압하는 것이 미국의 기본정책이라고 합니다.

소련에서의 민족주의의 대두를 통해서, 민족주의야말로 민주주의의 바탕이고

건전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러기에 미국의 대외정책을 고쳐야 한다 라고 그 컬럼니스트는 말합니다.

민족주의를 싫어했던 미국의 대외정책은 현대사에 있어서 큰 오류를 저질렀다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민족주의를 통일민족주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분단민족주의입니다.

분단상태를 역이용하여 통일을 외치면서 정치인들이 분단을 장기화하려는

트릭을 부리고 있다고 합니다. 민족주의가 악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통일이라든지 민족주의는 이른바 조선시대 때 선비들이 주장했던

삼화사상(三和思想)과 연관되어있습니다. 최익현이 삼화를 주장했습니다.

또한 안중근이 동양삼국삼화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무오독립선언서에 보면 '반도는 반도로 돌아가고, 일본은 섬으로 돌아가고,

중국은 중국땅을 보전할 지어다'라는 삼국삼화론,

이것이 우리의 민족주의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침략을 강조했지만, 그것은 우리 민족이 항상 침략당하기만 했다는

그런 패배주의 역사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조했던 것이지,

이제 우리는 침략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민족주의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건전한 민족주의가 한국에 살아있고 또 살려야 합니다.

 

 

22. 단군조선 논쟁

"단군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한국인들은 적이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선 그것이 한국 민족의 건국신화라고 믿어지고 있는 만큼, 민족과 더불어 고이 받들고

간직해야 할 성질의 것으로 생각되게 됩니다.

그러나 한편 오늘날의 상식에 비추어 볼 때, 문자 그대로는 믿을 수 없는 이 신화는 결국

부정되어야 할 수밖에 없을 무가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또 가지게 됩니다."

이기백(李基白)교수는 {단군신화의 문제점}이란 글에서 이와 같이 말하면서

오늘날 한국인의 마음 속에는 단군을 신화라 생각하는 반쪽과 반대로 단군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다른 반쪽이 서로 대립되어있는데,

신화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의 상식이요 사실이라 믿는 쪽이 상식 밖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더우기 그는 그런 상식 밖의 믿음을 가지고 신문과 잡지에

단군을 우리 할아버지라고 떠드는 것을 불유쾌한 일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교수는 최근 자신의 글을 포함하여 육당 최남선과 두계 이병도 등의 주로

단군신화론을 주장한 글들을 모아 {단군신화론집}(세문사, 1988)이란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그 서문에서 이교수는 단군 사실론을 주장하는 것은 불건전한 사상이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단군을 역사적 인물이요 단군이 건국한 옛 조선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것은

비과학적이라 주장하는 역사가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단군을 신화라 주장하는 역사가들을

일제식민사학의 계승자들이라 비난하는 역사가들이 있습니다.

앞의 역사가들은 주로 대학강단에 서 있으므로 강단사학자, 뒤의 역사가들은 대학 밖에 있는

사람들 이므로 재야사학자라 부르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뿌리를 생각하는데 있어 제일 먼저 부딪히는 문제는 바로 이 단군문제입니다.

단군의 건국 사실을 인정하느냐 않느냐에 따라서 한국인의 역사의식과 미래관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같이 중요한 문제를 차분히 지난날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982년 여름, 일본교과서의 한국사 왜곡문제가 제기되어 사람들을 격분하게 만들었는데,

그 때 단군조선을 비롯한 상고사와 우리 민족의 뿌리문제가 매우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 하면 그 때까지만 해도 이 문제는 소위 재야사학자들에 의해서만

거론되어 왔고, 사학계 및 일반 대중들에게는 큰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 바빠서 그랬을까요?

그러나 소수이지만 정력적인 재야사학자들은 오늘날 일반이 알고 있는 역사문제의 대부분을

그 때 이미 날카롭게 제기하였고, 문제의 근원은 결국 일제식민사관에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제식민사관이 한국사 왜곡의 주범이란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이를 별다른 고민없이 받아들여 오더니, 대학교수들은 매우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와 유사한 비난은 그보다도 훨씬 전인 1965년에 이미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1982년의 사건은 처음 일이 아니라 두번째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의 한국정부는 한국지식인들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20년간이나 단절되어온 한일국교를 정상화하였습니다.

그 때 한국을 포함한 한국지식인들이 한일국교 정상화를 반대한 이유는,

한국정부가 국교 재개의 조건으로 받아들인 일본 돈이 거의 반세기 동안이나 한국을 강점했던

그들의 죄값으로는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일본과 일인이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진정 가슴아프게 반성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은 1945년에 패전한 이후 한국에 대해 지난날의 역사적 과오를 뉘우쳤다기보다

마음 편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이 일본인에게서 받은 정신적인 상처와 물질적 피해는 너무 엄청난 것이어서

쉽게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이 같은 두 나라의 상반된 감정 속에서 한국은 1960년 이후 파괴된 역사상을

바로 잡아 세워야 진정한 의미의 광복을 실현할 수 있고,

나아가서는 분단된 조국을 통일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배경에서 시작된 단군조선 문제의 핵심은 과연 무엇일까요?

단군조선은 서기전 2333년에 건국된 것으로 알려진 한국 최초의 고대국가입니다.

단군은 민족의 시조이자 최초의 통치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해마다 그 분이 건국한 날로 알려진 10월 3일을 한국 최대의 국경일로

정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이 같은 공식적인 인정에도 불구하고,

대학강단에서는 단군의 건국 사실을 의문시하고 단순한 신화로 믿는다고 강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하겠습니다.

만일 단군이 역사적 인물이 아닌 귀신이요 단군조선이 신화 속의 나라라고 한다면,

한국사의 연령 또는 편년은 2천 년에 불과하나,

그렇지 않고 단군이 역사적 인물이요 단군조선이 역사적 왕국이었다면, 4천 년이 됩니다.

이와 같이 단군신화론과 단군사실론 사이에는 중대한 역사관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단군신화론이 나오게 된 중요한 이유는 한국에 있어서의 단군에 관한 최초의 문헌으로 알려진 [삼국유사]의 기록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스님인 저자 일연은 단군의 출생과 그의 가계에 대해 매우 신화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오기 전이나 나온 이후에도 한국민은 오랫동안 단군과 단군조선의 실재를

믿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단군과 그가 건국한 단군조선은 한민족의 역사신앙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910년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지 통치를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한국을 영원한 일본 영토로 만들고 한국민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하여,

한국인의 민족정신의 근원인 단군의 역사를 단순한 신화나 우화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우리는 또다시 독립국가를 갖게 되었으나,

일제가 남긴 정신적인 상처를 입은 역사의식에는 좀처럼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인의 정신적 상처의 주된 병인을 단군과 단군조선에 관한 역사적 파괴라고 판단한

소수의 재야사학자들은 끈질긴 노력으로 고대사 연구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들은 중국의 오랜 문헌들을 섭렵하여 단군과 단군조선의 사실을 증명하였고

한편으론 고고학, 인류학, 민속학, 종교 등 여러 분야에 걸친 연구성과를 원용하여

지난날의 단군신화론이 악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학 강단에서는 여전히 이러한 재야사학자들의 연구성과를 공인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상식 밖이요 불건전한 생각이라 비난했습니다.

한국의 대학강단에서는 당초부터 단군조선이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가설 하에

고대사 연구를 진행하여 왔기 때문에,

그들은 서기 1세기를 전후하여 건국한 고구려, 백제, 신라 등 3국의 역사 이전의

사실에 관해서는 고고학자들의 발굴 결과만을 기다려온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고고학자들이 발굴할 수 있는 유적이나 유물은 한반도,

그것도 남한에 국한되었으며 실제로 만주나 혹은 중국에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는

단군조선의 유적이나 유물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 없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실망한 재야 사학자들은 더 이상 나태한 강단사학자들의 연구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연구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 나름으로 단군과 단군조선의 실재를 밝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단군조선의 수도가 평양에 있었느니 하는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을 비판하고

그것이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단군조선의 수도는 만주땅을 동서로 가로질렀으며 그 수도는 송화강(松花江)의

하르빈(하얼삔)이었다고 추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강역은 서쪽으로 북중국, 동쪽으로는 연해주, 남쪽으로는 일본열도,

북쪽으로는 흑룡강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이었다는 사실을 밝혀 냈습니다.

이러한 재야사학자들의 결론은 이미 1930년대 일제 하에서 단재 신채호가 연구한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한 말에 유명한 언론인이기도 했던 그는 1910년을 전후하여 중국으로 망명,

1932년 여순감옥에서 옥사하기까지 {조선상고사}(1931년)라는 귀중한 연구업적을 남겼으며

이를 조선일보 지상에 연재한 바 있습니다.

진정한 항일투쟁은 역사투쟁이라고 믿었던 그는 평생토록 단군조선의 실재를 밝혀내는

작업에 헌신했습니다.

그의 불우한 일생에도 불구하고 그가 후세에 남긴 연구업적은 우리들 가슴 속에

큰 감명과 교훈으로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신채호의 연구를 계승한 또 하나의 고전적 역사가는 위당 정인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당시의 저명한 역사가인 육당 최남선의 단군무당론(檀君巫堂論)을 비판하면서,

단군신앙은 육당의 주장처럼 아시아의 어느 원시 사회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마술종교(魔術宗敎)가 아니라, 고대국가인 단군조선에만 있었던 종교문화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지난 5천 년동안 외국에서 유입된 불교문화와 유교문화 등

외래문화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가졌던 민족의 고유문화를 단군문화로 보고,

그것이 우리 민족의 뿌리를 이루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단군문화는 오늘날까지 한국인의 생활 속에 남아있어 한편으로는 무속문화,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와 유교문화 속에 뿌리깊게 간직된 채 한국인을 한국인답게 만들어 주는

기층문화(基層文化)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인의 뿌리 문제는 단군문제와 직결되어있습니다.

단군이 단순한 신화요 원시사회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미신의 단편이라면,

우리 한국인의 뿌리는 불투명한 유리그릇 속에 갇혀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우리의 고대사 속에 자리잡은 사실(史實)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확실한 뿌리를 갖는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단군의 문제는 최근 수년 사이에 갑작스레 나타난 역사논쟁이 아니라

근 1세기 동안이나 한국인 사이에 설왕설래하던 논쟁이었고,

마지막 단계가 바로 오늘의 논쟁인 것을 위의 설명에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가 오늘의 한국 문제와 밀접히 연관된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한국은 지난 40년간 남북으로 분단되어 왔으며 민족통일이 지상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4천 년 전에 한국은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출발했고

그 뒤 분열과 통일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본다면 통일의 역사적 근거는 확실합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통일은 근거없는 정치적 욕망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단군조선 사실론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걸맞는 역사관이요,

역사해석의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의 상황을 중시하는 외국인들은 단군논쟁을 한국에 있어서의 민족주의 발전의 한

국면으로 보고 위험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저를 방문한 바 있는 홍콩의 {극동경제평론(Far Eastern Economic Review)}지의

이안 부르마(Ian Bruma)기자는 한국에 있어서 단군주의 대두를 일본의 야먀토이즘(大和主義)

대두와 같은 것으로 보고 그 유사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안 부르마의 재치있는 추론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배경의 차이를 도외시한

일반론이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한국 특유의 상황에서 빚어진 역사가들의 논쟁이라는 측면을

고려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통치자들이 이 논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고 있다 하더라도,

학문적 수준에서 토의되고 있는 차원의 여러가지 논의마저 무효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단군과 그가 건국한 고대왕국 그리고 그 문화가 한국과 한국인 그리고 한국문화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논리는,

분명 오늘의 한국과 한국인에게 또 다른 사활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 주기를 간절히 그에게 바라고 싶은 것입니다.

 

 

 

 - 박성수 교수 -

 

◆ 약 력


서울대 사범대 및 고려대 대학원 졸업 성균관대 문과대 부교수 역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 역임, 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및 편찬부장

◆ 저 서


역사학 개론, 문화사 개론, 독립운동사 연구, 한국근대사의 재인식,

역사이해와 비판의식, 단군기행, 역사는 무엇인가 외

역사 의식과 사회, 역사란 무엇인가 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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