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얻으려거든 정보를 먼저 쥐어라
[태종 이방원]토지개혁
치열했던 시가전이 태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개경은 빠르게 평온을 되찾았다.
철시했던 개경의 번화가 십자로의 시전(市廛)도 문을 열었다.
연복사에 불공드리러 가는 여인네들의 발걸음도 보이기 시작했다.
보정문 어름에 있는 홍등가도 빼꼼이 문을 열고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 난리 통에 머시기 장사는 좀 거시기 하기 때문이다.
선의문(宣義門) 밖 벽란도 가는 길목에 있는 개성 한우물(開城大井)은
피아간에 시신이 수북이 쌓여 마시지 못했지만 명나라와 서역에서 들어온 물건들이
바리바리 수레에 실려 개경으로 들어왔다. 그 당시 예성강 포구는 국제 항구였다.
향신료와 장신구를 가득 실은 아라비아 상인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백성들의 마음도 대체적으로 두 갈래로 나뉘었다.
“왕을 내쫓다니 묵과할 수 없다”는 불용파와
“왕도 잘못하면 쫓겨나야지” 라고 받아들이는 용인파다.
평소에 “정치는 왕이나 하고 권문세족이나 하는 것이지 우리 같은 무지랭이들이 무신 정치?”
라며 도리질하던 백성들도 이번 사태만큼은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외견상 평온과 질서를 유지한 것 같은 권력의 세계는 수면 하에서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다.
이색(李穡)을 구심점으로 하는 유학자들의 왕당파와 조민수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적 군인세력,
그리고 이성계를 정점으로 하는 혁명불사 진보세력이다.
이들은 자파의 색깔을 분명히 들어내며 세 모으기에 혈안이 되었다.
고려 왕조를 사수하라
이색을 정점으로 자연스럽게 모여든 이숭인, 정몽주, 김구용 등 왕당파는
이성계 진영에서 흘러나오는 “차기 왕 이성계 추대론”에 대해서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이성계를 차기 왕이라니 용납할 수 없는 망발이었다.
왕명을 거역하고 회군한 반란군 수괴에게 면죄부를 주는것 조차도 내키지 않았는데
그 장본인이 용상에 오르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민왕에서 우왕 창왕으로 이어지는 왕조는 바람 앞에 등불처럼
금방 꺼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왕조지만 그래도 500년 고려사직을 이어가는 왕조다.
여기에서 이씨가 왕조를 이어받는다면 계통이 달라진다. 역성을 의미하지 않은가?
왕당파에겐 목숨 걸고 저지해야 할 지상의 과제였다.
자신들의 가슴에 담아둔 양심과 학식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폭거였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과 구파 군벌이 물러나고
신흥 군벌이 전권을 장악한 개경은 권력 판도에서 미묘한 흐름이 포착되었다.
혁명군의 쌍두마차 조민수의 집은 썰렁한 반면
부흥산 아래 이성계의 집은 드나드는 사람으로 하루 종일 북새통을 이루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성계의 목청전보다도 추동에 있는 방원의 집에
더 많은 사람이 드나든다는 사실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이성계보다 이방원이 더 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람을 상대할 때 상대가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좋은 자산이다.
우선 나이에서 약관을 갓 넘은 파릇파릇한 청년이다.
방원과 대화의 상대자들은 30~40대, 또는 아버지와 같은 연배인 50대들이다.
그러니까 편하게 대하고 스스럼없이 가까이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방원과 대화를 시작하면 또 한 번 놀랜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이가 왠 속은 그리도 깊은지... 무슨 얘기나 가리지 않고 다 소화시킨다.
그 많은 이야기 속에는 버려야 할 모레가 많지만 그래도 끝까지 들어준다.
이번에 보석을 건져내지 못하면 다음에 보석을 건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33칸 사랑채에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모든 정보는 방원의 집으로 통했다.
개경의 실력자 민제가 이방원을 사위로 맞아들일 때 대궐같이 큰 99칸 집을 추동에 지어줬다.
“방원이에게 장차 쓰임새가 있을 것이다”는 친구 하륜의 권고를 받아들여
그 중 3분지1에 해당하는 33칸을 사랑채로 지었다.
지으면서도 친구 하륜에게 “함흥 촌놈에게 이렇게 큰 사랑채가 과하지 않나요?” 라며
방원을 무시하고 하륜에게 핀잔을 주던 일이 있었다.
예전에는 찾아오는 사람 없어 을씨년스럽고 흉측하기까지 했던 사랑채가
이제야 세월을 만난 셈이다.
33칸 방마다 찾아오는 손님으로 꽉꽉 들이차고
그것도 모자라 마당에 멍석을 펴고 자리를 잡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방원은 이럴 때 일수록 잘해야 한다고 아랫사람들을 독려했다.
“문턱을 넘어온 손님이 문턱을 넘어 갈 때 까지 불편함이 없도록 하여라.”
이방원의 이러한 열정이 열매를 맺어서일까?
허잡한 쓰레기 성 정보도 많았지만 순도 높은 양질의 정보도 섞여 있었다.
정보 수집력과 분석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성리학적 사고방식으로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이방원은 정보를 대하는 입장에서
객관성을 유지 할 수 있고 냉철하게 분석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이성계도 잘 모르는 군 관계 정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관료사회의 첩보, 백성들의 민심동향, 황실의 동정,
심지어 아버지 이성계가 모르는 조민수에 대한 특급정보와 아버지 이성계에 대한 정보까지
방원의 안테나에 걸려들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대륙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는 원나라와 명나라.
그리고 남해안 바다건너 일본 정보까지 망라되었다.
정보라고 해서 다 정보가 아니다.
생선에도 선도가 있듯이 정보에도 선도(鮮度)가 중요하다.
이미 공개된 정보는 정보로서의 희소가치를 상실한다.
순도((純度)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싱싱한 정보라 해도 신뢰성에 문제가 있으면 정보로서의 가치가 하락한다.
이방원이 공을 들여서 일까? 접수되는 정보들은 대체적으로 선도도 좋았고 순도도 좋았다.
“천하를 얻으려거든 정보를 먼저 손에 넣어라”
방원은 새삼스러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고 무릎을 쳤다.
이후 방원의 행동반경에 있었던 모든 사건들은 성공한다. 정보력 때문이다.
이방원의 생애를 되짚어보면 엄격히 말해서 과거에 급제했지만 성리학자도 아니다.
아버지가 무인이었지 방원은 무인이 아니었다.
권력 추구형 정보 장악사(掌握士)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5,16 직후.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어쩌고 하는 혁명공약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JP가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것과 12,12 하극상 이후
반란수괴가 보안사와 정보부를 장악한 것으로 보아 혁명아들은 정보를 좋아하나 보다.
이로 미루어 혁명에게 정보는 좋은 먹잇감이며 혁명과 정보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관계에 있는지 모르겠다.
매일같이 새롭게 접수되는 정보는 분석하여 토론에 부치고 대응방법을 논의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방원과 토론그룹을 힘들게 하는 것이 있었다.
이색(李穡) 진영에서 흘러나온 모종의 특급정보가 있는데
아직 알맹이에 접근하지 못하여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보안 유지가 너무나 철저하여 파고들지 못해 답답했다.
이색 진영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이 분명 있긴 한데 지금 현재로서는 알 수 없고
그렇다고 하염없이 기다릴 수 없었다. 우선 목표물을 조민수로 돌리기로 했다.
토지개혁이다.
조민수를 대표 목표물로 설정했지만 과하게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모든 권문세족과 사찰을 향한 선전포고였다.
심상치않은 이색 진영 움직임, '뭔가 있다'
혁명의 와중에 있던 1388년 고려는 토지를 갖고 있는 농민의 숫자가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다수 농민들이 땅 한 평 없는 기이한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취약한 사회구조가 바로 혁명을 부르는 고려의 아킬레스건이었다.
백성들은 권문세족에게 소작농으로 수탈당하거나 사찰 소유의 경작지에서
노예처럼 일하며 생명을 부지했다.
5년 전. 정도전이 이성계의 함주 군막을 찾아 '조선건국사업'의 첫 삽을 뜬 일이 있다.
첫 삽을 기념하기 위하여 살아있는 소나무의 껍질을 벗겨 결의를 새겨놓은 일도 있다.
그 때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제시한 계획서에 수록된 <고려진단서>는
'구제불능성 사망증후군'이었다.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진단이었다. 고려는 회생 가능성이 없는 대책 없는 나라였다.
매관매직으로 인한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원성은 비등점을 웃돌았다.
백성들의 고혈이 소진되자 이제는 먹이감을 동족으로 옮겨 권문세족끼리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었다.
권문세족들의 암투는 고려 사직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자신들의 파멸은 물론 바탕을 제공한 왕조마저 위태롭게 했다.
성리학을 수학하여 도덕성으로 무장한 정도전의 눈에 비친 고려는 '식물국가'였고
겨우 명줄이 살아남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중환자였다.
왕비가 소속불명의 아이를 임신하여 왕실을 흔들어 놓은 국가.
왕이 신하에게 살해당하는 세상.
대륙의 정권교체기에 앞 다투어 힘센 나라에 머리를 조아리는 사대관료들이 판치는 조정.
고려는 한심한 나라였다.
천운이 닿아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지위에 서게 되면 마지막 수단으로 토지개혁을
시도해 보고 싶은 것이 정도전의 소망이었다.
이것마저 약발을 받지 않을 경우 '혁명은 필수'라는 단서가 있었다.
이것이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제출한 고려 보고서였다.
행운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그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토지개혁 실시해 비틀거리는 왕조 바로잡자
'토지는 농민에게'라는 한마디로 압축되는 토지개혁은 정도전의 위민(爲民)사상이
알알이 녹아있는 정책이다.
왕조 봉건사회에서 땅을 농민에게 준다는 것은 기존질서를 어지럽히는 반동적인 사상이었다.
그저 농민은 소나 말처럼 부려먹고 토지는 왕실이나 권문세족이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 처럼 인식되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 분배한다는 것은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이러한 구상을 입 밖에 내놓는다는 것은 자신의 목을 내놓는 거와 같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정도전은 해냈다. 여기에서 정도전의 백성 사랑이 얼마나 깊은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훌륭한 정책도 혁명의 파고에 떠밀려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
정도전의 초안을 잘 다듬어 대사헌 조준(趙浚)이 상소문으로 치고 나왔다.
사전(寺田)과 사전(私田)을 몰수하여 땅 없는 백성에게 나누어 주자는 토지개혁 상소문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자 백성들은 환호했다.
경향각지의 농민들이 대환영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조민수가 반발하고 나왔다.
이성계라는 '뒷배'가 있는 조준은 맞받아치고 나왔다.
"조민수가 백성들의 땅을 빼앗고 상소문 올리는 것을 방해했다."
폭로성 상소문이 계속 이어지자 결국 조민수가 손을 들었다. 졌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조민수가 패배했다는 것은 혁명군의 한 축을 담당했던 그의 퇴장을 의미한다.
이제 혁명군에는 이성계를 제어할 힘을 가진 세력이 없어진 셈이다.
조민수는 권좌에서 물러나 창녕으로 귀양길에 올랐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하지만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의 숙청과 너무나 닮아있다.
이성계 진영에서 토지개혁을 들고 나온 것은 두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첫째가 착취구조를 개선하여 고려 사회를 점진적으로 개혁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또 하나는 뚜렷한 비전 없이 혁명세력에 무임승차한 조민수의 제거였다.
조민수는 공민왕이 설정해놓은 친명외교노선을 버리고 친원정책을 표방한 수구꼴통
'이인임'계 로서 토지주를 보호하려 했었다.
총론에서 공감하지만 각론에서 대립하는 유학자들
조민수를 마지막으로 구파 군벌은 말끔히 청산되었다.
조정의 제신들도 대부분 성리학을 공부한 학자들로 채워졌다.
마지막 군벌 이성계 하나만 제외하고 불교국가에서 유학자들의 세상이 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혁명적인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더 많은 결과를 기대했고 더 빠른 변화를 요구했다.
다행스럽게도 이성계는 구시대 군벌이었지만 유학자들과 대화가 통했다.
케케묵은 구닥다리 군인이지만 새로운 사상과 학문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진중에서
성리학을 틈틈이 공부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유학자들에게 있었다.
도덕성으로 무장한 유학자들이 "고려를 구하자"는 총론에서는 공감했지만 방법론에서는
생각을 달리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고려 왕조는 지켜야 한다"는
이색과 정몽주, 이숭인을 주축으로 한 수호파와
"뼈를 깎는 개혁만이 살 길이다. 개혁가지고 안되면 혁명도 불사한다"는
정도전, 조준 등의 급진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며 각을 세웠다.
병권은 이성계의 손에 있었지만 문인 우위의 균형아래서 서로를 감시하는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상대의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이방원의 정보망을 긴장시키는 것은 이색 진영의 결집력이었다.
이색 진영에 이숭인, 정몽주, 김구용 등이 뻔질나게 드나들며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방원의 안테나에 정확한 것이 걸리지 않아 애를 먹고 있는데 희미하게 포착된 것이 있었다.
명나라 사신이 두 팀으로 짜여 진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왜? 갑자기 두개 팀으로 구성되어야 하는지 아리송한 일이었다. 도저히 분석이 안 되었다.
평소 한 개 팀이 모든 업무를 소화하는 사신 길에 복수의 팀이 시차를 두고 떠난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정보를 가지고 아버지와 상의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갑자기 커버린 것을 실감한 이방원
방원은 등청에 앞서 아버지 사제를 찾아 집을 나섰다.
추동 집을 나와 십자로에서 숭인문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불과 며칠 전, 아버지의 회군 소식을 접했을 때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던 길인데
감회가 새로웠다.
선죽교를 건넜다. 이른 아침이라 골안개가 피어오르고 평화스러워 보였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자신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우선 만지는 정보의 성격부터 달랐다. 전리정랑직 자체가 관리들의 인사문제를 다루는
직책이라 사람에 관한 정보를 다루는 것이 주 업무였지만 지금 만지는 정보에 비하면
소소하기 짝이 없는 미미한 것들이었다.
말 잔등에 몸을 맡기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어느덧 어배동에 도착했다.
"명나라 사신문제로 소자가 거론되거든 아무 말씀 마시고 받아두십시요.
덕분에 명나라 구경 한 번 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계를 만나자 마자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얘기했다.
뜬금없이 사신이야기가 튀어나오고 명나라 이야기가 튀어나오니 이성계는 무슨 영문인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이 가을이다. 되짚어보니 하정사가 거론될만한 시기였다.
중국의 황제가 있는 곳은 금릉(남경)이다.
고려 개경에서 8000리 길. 새해 인사를 하려면 10월 이전에는 개경을 출발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에 사신을 정기적으로 보내는 것을 1년 3사라 하여
중국 황제에게 신년 인사를 올리는 하정사(賀正使),
황제의 생신을 축하하는 성절사(聖節使),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춘추사(春秋使) 등이 있었으며
부정기적으로 사은사, 동지사, 주청사, 계품사 등의 이름으로 사유가 발생했을 때
수시로 파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