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태종 이방원

기산(箕山) 2006. 12. 5. 02:32
대감댁 따님이 장군의 아들에게 시집간다네
평생 혁명 동지와의 만남
  이정근(ensagas) 기자   

용수산 골짜기가 떠들썩한 결혼식

개경의 진산이 송악이라면 안산은 용수산이다.

북쪽의 송악산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경외로운 산이라면

남쪽의 용수산은 뭐든지 받아 줄 것 같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산이다.

개경의 중심 번화가 십자로에서 연복사를 지나 회빈문으로 가다보면 민제의 집이 있다.

훗날 본궁으로 불리는 민대감 댁이다.

용수산 골짜기가 떠들썩하다. 열일곱 살 대감댁 둘째 딸이 시집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신랑은 두 살 아래 열다섯 살. 장군의 아들이란다.

무반 집 다섯째 아들답지 않게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한 신랑감이다.

그것도 무과가 아니라 문과에 붙어 장래가 촉망되는 훌륭한 신랑감이다.

얼굴 한번 보지 못했지만 잘 생겼으리라 믿고 싶다. 그래도 가슴이 설렌다.

어떻게 생겼을까? 잘 생겼을까? 못 생겼을까? 하지만 못생겼어도 가야하는 시집길이다.

부모님이 그것도 아버지가 맺어준 배필인데 거역할 수가 없다.

예의판서 민제. 신부의 아버지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과거 급제하여 국자직학(國子直學),

판전의사(判典儀事), 지춘추사(知春秋事), 판소부시사(判小府寺事)를 거치며 잘 나가는 관료다.

이색, 정몽주, 이숭인과 같은 석학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지만 실력 있는 유학자다.

이렇게 명망 있는 민대감 댁 둘째 딸이 무반(武班)댁에 시집을 간다.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대감댁 따님이 장군의 아들에게 시집간다네

당시 유학자들은 무반을 한수 아래로 봤다. 특히 성리학에 심취한 학자들이 더했다.

의(義)를 숭상하고 도덕(道德)을 지상 최대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성리학자들의 입장에선

무반은 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불의(不義)를 알면서도 명령이라는 이름하에 합리화하는 무인(武人)들을 하위개념으로

평가 절하했다.

모르고 저지르는 것보다 더 나쁘다는 것이다.

과거에 급제한 신랑이 친영을 나왔다.

북방을 침범하는 여진족과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도망간다는

장군 집 아들이다. 말 그대로 장군의 아들이다.

선죽교 건너 안정방 어배동 신랑 집에서 왔으니 30여 리를 말 타고 왔다.

판서 대감댁 앞마당에 초례청이 설치되었다.

여염집 혼례와 달리 유학자 대감댁 혼례는 격식이 엄격하고 절차가 까다롭다.

잘 나가는 대감댁 혼례라 온 동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신부댁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이 사람들로 메워졌다.

과거에 급제한 장군의 아들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서다.

기러기 한 마리를 싼 보자기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신랑 집(훗날 목청전)에서 나온 사람이 앞장섰다.

대감댁에서 마중 나온 처남의 안내를 받으며 꼬마신랑이 대문을 들어섰다.

구경나온 사람들이 '장군의 아들이 어떻게 생겼나?'

호기심 어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기에 여념이 없다.

그 틈바구니에서 무질이도 넋을 놓고 쳐다보느라 콧물이 흘러내리는 것도 모른다.

장군의 아들이라서 그런가? '잘 생겼네'

옆에 선 아낙이 "너의 매형 될 사람이야"라며 옆구리를 찔러도

누나하고 매형이 자신에게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저 잔치가 좋을 뿐이다.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좋다. 며칠 전부터 장만한 맛있는 음식을 생각하면 군침이 돈다.

이렇게 만난 음식을 먹게 해준 매형이 고마울 뿐이다.

훗날 그 매형의 손에 죽을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멍석 위에 돗자리를 깔고 마련한 대례청에 신랑과 신부는 시선을 내리깔고 마주 섰다.

전안위(奠雁衛)에 기러기를 올려놓고 꼬마 신랑이 두 번 절을 했다.

전안례다.

대감댁 할멈이 기러기 보자기를 치마로 감싸듯이 받아들고 안방으로 들어가 시루로 엎어 놓는다.

치마로 감싸는 것은 다산을 기원하며 떡 시루는 장수를 바라는 축원이다.

신랑신부 교배례가 이루어졌다. 맞절이다.

신부의 절은 다소곳하고 고왔지만 신랑의 절은 거칠었다.

아버지가 전장을 떠돌다 보니 많은 것을 가르쳐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랑신부가 합근례를 치르고 잔치가 벌어졌다.

대감댁 잔치라 그런지 먹을 것이 많다. 산해진미가 그득하다.

풍악이 울려 퍼지고 마당 한쪽에선 무희패가 재주를 넘느라 요란하다.

여기저기 잔칫상을 받아든 동네사람들이 음식을 먹으며 "신랑이 잘 생겼다"

"신부가 손해 보는 것 같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터진다.

서문 밖 거지들도 몰려오고 예성강 나루터 떨거지들도 몰려왔다.

대감댁 잔치는 먹을 것이 많다고 소문이 나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잔칫집에선 가리지 않고 상다리가 부러지게 한상 거하게 차려준다.

관상의 대가 하륜을 불러 신랑의 관상을 보니

"그래, 어떻게 보았소? 말 좀 해 보시구려 하공."

하륜과 주안상을 마주한 신부의 아버지 민제가 마른 침을 넘기며 채근했다.

궁금하고 답답하니 빨리 얘기를 해달라는 뜻이다.

하륜은 민대감이 오늘 혼례에 신랑의 관상을 봐 달라고 특별히 초대한 손님이다.

고려 말 혼란기에 도참설이 극성을 부렸다.

개경의 지기가 다 되었으니 천도를 해야 하고 누구는 조상의 묘를 이장하여 입신출세했다는 등

벼라 별 설과 소문이 횡횡했다.

이러한 개경에 도참 3대가가 있었으니 권중화와 하륜 그리고 무학대사였다.

권중화는 왕릉을 관리하는 조정의 관리였고 무학대사는 정처없이 떠도는 스님이었다.

하륜은 공민왕 때 문과 급제하여 감찰규정과 고공좌랑을 거쳐 풍수지리와 관련이 없는

밀직사 첨서사로 있었지만 도참설의 대가였다.

훗날 한양천도에도 참여한 인물이다. 특히 풍수도참 외에 관상에 정통했다.

이러한 그의 능력을 알고 있는 민대감이 하륜을 특별히 초대한 것이다.

귀 좀 빌려주세요

"우선 따님의 혼례를 경하드립니다."
그리고 말이 없다. 하륜의 입을 바라보고 있던 민대감이 답답하다는 듯이 안절부절이다.

"자, 자. 내 술 한 잔 더 받으시고 어서 말해 보구려."
민대감이 하륜의 술잔에 그득히 술을 친다.

입가에 웃음을 흘리던 하륜이 술잔을 받쳐 들고 단숨에 목으로 털어 넣는다.

"대감 나으리 귀를 좀 빌려 주셔야겠습니다."
술잔을 내려놓은 하륜이 민대감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아니, 무슨 귓속말씩이나?"
"이 얘기는 천기를 누설하는 말이라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하륜이 정색을 하자 민대감이 귀를 하륜에게 들이댔다.

 
왕기가 서린다니 근심이 태산이로다
평생 혁명동지와의 만남
 

관상의 대가 하륜이 던진 충격의 한마디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하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기가 서립니다."

딱 한마디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민대감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까무러치게 놀랐다.

"아니, 하공? 그게 정말이오? 당치않은 얘기 하지 마시오."

외마디 소리를 지른 민대감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하륜의 말이 정말이라면 기쁜 일이 아니라 삼족이 멸할 흉사다.

지금 개경에 왕(王)씨 말고 왕기를 받을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민대감의 고성에 놀라 마당에서 잔치 음식을 먹던 하례객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내, 못들은 것으로 할 터이니 그런 소릴랑 당최 입 밖에 내지 마시오."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민대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륜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하수상한 세상에 나타난 신비스러운 스님

맛있는 전을 입속에 우겨넣던 무질이 봉창에 음식을 잔뜩 집어넣은 채 동생 무휼이의

손을 잡고 대문 쪽으로 뛰어나갔다.

문밖에 서성이는 동네 친구들에게 만난 음식 자랑을 하기 위해서다.

이때 대문을 들어서던 지팡이에 걸려 넘어졌다.

"인석아, 앞을 보고 뛰어가야지."

지팡이의 주인을 바라보니 하얗게 수염을 기른 스님이 장갓을 쓰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님이 뭔데 대감댁 도령에게 인석이라 하시오?"

눈을 치뜨며 스님을 노려보고 있었다.

깊은 산에 틀어박혀 수도 정진해야 할 스님들이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많은 폐단을 낳다 보니

어린 아동들에게도 존경을 받지 못했다.

공민왕의 신임을 빌미로 전횡을 일삼던 신돈이 역모를 획책하다가 처형된 이후로

스님들의 위상이 더욱 추락했다.

"고 녀석, 고얀 지고…."

말끝을 흐리며 마당으로 들어선 스님은 마당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뒤따라 개다리소반에 음식이 차려져 내왔다.

상차림을 흩어보던 스님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내뱉었다.

"이렇게 좋은 안주에 술이 없어서 되겠느냐? 곡차도 내 오너라."

하례객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놓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정신없이 바쁜

하인을 붙잡고 힐난조의 호통이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던 하인이 스님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스님도 술을 잡수십니까?"
"이 녀석아 내가 언제 술을 내오라 하였더냐?"
"곡차가 술이 아니고 뭐입니까?"
"나는 곡차를 내오라 하였으니, 술을 내오던 곡차를 내오던 그건 네가 할 따름이다?"

하인은 어이가 없었다. 말문이 막혀 스님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오늘같이 좋은 날 시비를 한들 무엇하랴.

오늘은 대감 나으리 둘째딸 시집가는 잔칫날인데 허허 웃어야지.

마음을 다잡은 하인은 호리병에 담긴 술 한 병을 내다 주었다.

글씨를 남긴 스님은 홀연히 사라지고

잔치가 파할 무렵, 하인 장쇄가 민대감이 있는 사랑방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감마님, 음식에 술까지 얻어먹은 중놈이 곡차 값을 해야겠다며 지필묵을 내 오라는뎁쇼."

스님의 하는 행동거지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다.

"어디에서 온 누구라더냐?"
"지나는 객승인데 술값을 하겠다며 저 푼수를 떨고 있습니다요."
"하하하, 스님이 잔칫집에서 술 얻어 마시고 술값이라? 거 일리 있는 얘기다.

그렇다면 내다 주어라."

수염을 쓰다듬던 민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지필묵을 내다 주라고 일렀다.

잠시 후, 장쇄가 스님이 써주고 간 글씨라며 두루마리를 민제에게 내밀었다.

글씨를 펼쳐든 민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

 

 

 

 

천하를 얻으려거든 정보를 먼저 쥐어라

[태종 이방원]토지개혁

 

치열했던 시가전이 태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개경은 빠르게 평온을 되찾았다.

철시했던 개경의 번화가 십자로의 시전(市廛)도 문을 열었다.

연복사에 불공드리러 가는 여인네들의 발걸음도 보이기 시작했다.

보정문 어름에 있는 홍등가도 빼꼼이 문을 열고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 난리 통에 머시기 장사는 좀 거시기 하기 때문이다.


선의문(宣義門) 밖 벽란도 가는 길목에 있는 개성 한우물(開城大井)은

피아간에 시신이 수북이 쌓여 마시지 못했지만 명나라와 서역에서 들어온 물건들이

바리바리 수레에 실려 개경으로 들어왔다. 그 당시 예성강 포구는 국제 항구였다.

향신료와 장신구를 가득 실은 아라비아 상인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백성들의 마음도 대체적으로 두 갈래로 나뉘었다.

“왕을 내쫓다니 묵과할 수 없다”는 불용파와

“왕도 잘못하면 쫓겨나야지” 라고 받아들이는 용인파다.

 

평소에 “정치는 왕이나 하고 권문세족이나 하는 것이지 우리 같은 무지랭이들이 무신 정치?”

라며 도리질하던 백성들도 이번 사태만큼은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외견상 평온과 질서를 유지한 것 같은 권력의 세계는 수면 하에서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다.

이색(李穡)을 구심점으로 하는 유학자들의 왕당파와 조민수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적 군인세력,

그리고 이성계를 정점으로 하는 혁명불사 진보세력이다.

이들은 자파의 색깔을 분명히 들어내며 세 모으기에 혈안이 되었다.


고려 왕조를 사수하라


이색을 정점으로 자연스럽게 모여든 이숭인, 정몽주, 김구용 등 왕당파는

이성계 진영에서 흘러나오는 “차기 왕 이성계 추대론”에 대해서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이성계를 차기 왕이라니 용납할 수 없는 망발이었다.

 

왕명을 거역하고 회군한 반란군 수괴에게 면죄부를 주는것 조차도 내키지 않았는데

그 장본인이 용상에 오르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민왕에서 우왕 창왕으로 이어지는 왕조는 바람 앞에 등불처럼

금방 꺼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왕조지만 그래도 500년 고려사직을 이어가는 왕조다.

여기에서 이씨가 왕조를 이어받는다면 계통이 달라진다. 역성을 의미하지 않은가?

 

왕당파에겐 목숨 걸고 저지해야 할 지상의 과제였다.

자신들의 가슴에 담아둔 양심과 학식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폭거였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과 구파 군벌이 물러나고

신흥 군벌이 전권을 장악한 개경은 권력 판도에서 미묘한 흐름이 포착되었다.

혁명군의 쌍두마차 조민수의 집은 썰렁한 반면

부흥산 아래 이성계의 집은 드나드는 사람으로 하루 종일 북새통을 이루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성계의 목청전보다도 추동에 있는 방원의 집에

더 많은 사람이 드나든다는 사실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이성계보다 이방원이 더 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람을 상대할 때 상대가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좋은 자산이다.

우선 나이에서 약관을 갓 넘은 파릇파릇한 청년이다.

방원과 대화의 상대자들은 30~40대, 또는 아버지와 같은 연배인 50대들이다.

그러니까 편하게 대하고 스스럼없이 가까이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방원과 대화를 시작하면 또 한 번 놀랜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이가 왠 속은 그리도 깊은지... 무슨 얘기나 가리지 않고 다 소화시킨다.

그 많은 이야기 속에는 버려야 할 모레가 많지만 그래도 끝까지 들어준다.

이번에 보석을 건져내지 못하면 다음에 보석을 건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33칸 사랑채에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모든 정보는 방원의 집으로 통했다.

개경의 실력자 민제가 이방원을 사위로 맞아들일 때 대궐같이 큰 99칸 집을 추동에 지어줬다.

“방원이에게 장차 쓰임새가 있을 것이다”는 친구 하륜의 권고를 받아들여

그 중 3분지1에 해당하는 33칸을 사랑채로 지었다.


지으면서도 친구 하륜에게 “함흥 촌놈에게 이렇게 큰 사랑채가 과하지 않나요?” 라며

방원을 무시하고 하륜에게 핀잔을 주던 일이 있었다.

예전에는 찾아오는 사람 없어 을씨년스럽고 흉측하기까지 했던 사랑채가

이제야 세월을 만난 셈이다.


33칸 방마다 찾아오는 손님으로 꽉꽉 들이차고

그것도 모자라 마당에 멍석을 펴고 자리를 잡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방원은 이럴 때 일수록 잘해야 한다고 아랫사람들을 독려했다.

“문턱을 넘어온 손님이 문턱을 넘어 갈 때 까지 불편함이 없도록 하여라.”


이방원의 이러한 열정이 열매를 맺어서일까?

허잡한 쓰레기 성 정보도 많았지만 순도 높은 양질의 정보도 섞여 있었다.

정보 수집력과 분석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성리학적 사고방식으로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이방원은 정보를 대하는 입장에서

객관성을 유지 할 수 있고 냉철하게 분석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이성계도 잘 모르는 군 관계 정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관료사회의 첩보, 백성들의 민심동향, 황실의 동정,

심지어 아버지 이성계가 모르는 조민수에 대한 특급정보와 아버지 이성계에 대한 정보까지

방원의 안테나에 걸려들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대륙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는 원나라와 명나라.

그리고 남해안 바다건너 일본 정보까지 망라되었다.


정보라고 해서 다 정보가 아니다.

생선에도 선도가 있듯이 정보에도 선도(鮮度)가 중요하다.

이미 공개된 정보는 정보로서의 희소가치를 상실한다.

 

순도((純度)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싱싱한 정보라 해도 신뢰성에 문제가 있으면 정보로서의 가치가 하락한다.

이방원이 공을 들여서 일까? 접수되는 정보들은 대체적으로 선도도 좋았고 순도도 좋았다.


“천하를 얻으려거든 정보를 먼저 손에 넣어라”


방원은 새삼스러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고 무릎을 쳤다.

이후 방원의 행동반경에 있었던 모든 사건들은 성공한다. 정보력 때문이다.

이방원의 생애를 되짚어보면 엄격히 말해서 과거에 급제했지만 성리학자도 아니다.

아버지가 무인이었지 방원은 무인이 아니었다.

권력 추구형 정보 장악사(掌握士)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5,16 직후.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어쩌고 하는 혁명공약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JP가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것과 12,12 하극상 이후

반란수괴가 보안사와 정보부를 장악한 것으로 보아 혁명아들은 정보를 좋아하나 보다.

이로 미루어 혁명에게 정보는 좋은 먹잇감이며 혁명과 정보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관계에 있는지 모르겠다. 


매일같이 새롭게 접수되는 정보는 분석하여 토론에 부치고 대응방법을 논의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방원과 토론그룹을 힘들게 하는 것이 있었다.

이색(李穡) 진영에서 흘러나온 모종의 특급정보가 있는데

아직 알맹이에 접근하지 못하여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보안 유지가 너무나 철저하여 파고들지 못해 답답했다.


이색 진영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이 분명 있긴 한데 지금 현재로서는 알 수 없고

그렇다고 하염없이 기다릴 수 없었다. 우선 목표물을 조민수로 돌리기로 했다.

토지개혁이다.

조민수를 대표 목표물로 설정했지만 과하게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모든 권문세족과 사찰을 향한 선전포고였다.

 

 

심상치않은 이색 진영 움직임, '뭔가 있다'

 

혁명의 와중에 있던 1388년 고려는 토지를 갖고 있는 농민의 숫자가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다수 농민들이 땅 한 평 없는 기이한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취약한 사회구조가 바로 혁명을 부르는 고려의 아킬레스건이었다.

백성들은 권문세족에게 소작농으로 수탈당하거나 사찰 소유의 경작지에서

노예처럼 일하며 생명을 부지했다.

5년 전. 정도전이 이성계의 함주 군막을 찾아 '조선건국사업'의 첫 삽을 뜬 일이 있다.

첫 삽을 기념하기 위하여 살아있는 소나무의 껍질을 벗겨 결의를 새겨놓은 일도 있다.

그 때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제시한 계획서에 수록된 <고려진단서>는

'구제불능성 사망증후군'이었다.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진단이었다. 고려는 회생 가능성이 없는 대책 없는 나라였다.

 

매관매직으로 인한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원성은 비등점을 웃돌았다.

백성들의 고혈이 소진되자 이제는 먹이감을 동족으로 옮겨 권문세족끼리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었다.

권문세족들의 암투는 고려 사직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자신들의 파멸은 물론 바탕을 제공한 왕조마저 위태롭게 했다.

성리학을 수학하여 도덕성으로 무장한 정도전의 눈에 비친 고려는 '식물국가'였고

겨우 명줄이 살아남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중환자였다.

왕비가 소속불명의 아이를 임신하여 왕실을 흔들어 놓은 국가.

왕이 신하에게 살해당하는 세상.

대륙의 정권교체기에 앞 다투어 힘센 나라에 머리를 조아리는 사대관료들이 판치는 조정.

고려는 한심한 나라였다.

천운이 닿아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지위에 서게 되면 마지막 수단으로 토지개혁을

시도해 보고 싶은 것이 정도전의 소망이었다.

이것마저 약발을 받지 않을 경우 '혁명은 필수'라는 단서가 있었다.

이것이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제출한 고려 보고서였다.

행운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그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토지개혁 실시해 비틀거리는 왕조 바로잡자

'토지는 농민에게'라는 한마디로 압축되는 토지개혁은 정도전의 위민(爲民)사상이

알알이 녹아있는 정책이다.

왕조 봉건사회에서 땅을 농민에게 준다는 것은 기존질서를 어지럽히는 반동적인 사상이었다.

그저 농민은 소나 말처럼 부려먹고 토지는 왕실이나 권문세족이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 처럼 인식되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 분배한다는 것은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이러한 구상을 입 밖에 내놓는다는 것은 자신의 목을 내놓는 거와 같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정도전은 해냈다. 여기에서 정도전의 백성 사랑이 얼마나 깊은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훌륭한 정책도 혁명의 파고에 떠밀려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

정도전의 초안을 잘 다듬어 대사헌 조준(趙浚)이 상소문으로 치고 나왔다.

사전(寺田)과 사전(私田)을 몰수하여 땅 없는 백성에게 나누어 주자는 토지개혁 상소문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자 백성들은 환호했다.

경향각지의 농민들이 대환영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조민수가 반발하고 나왔다.

이성계라는 '뒷배'가 있는 조준은 맞받아치고 나왔다.

"조민수가 백성들의 땅을 빼앗고 상소문 올리는 것을 방해했다."

폭로성 상소문이 계속 이어지자 결국 조민수가 손을 들었다. 졌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조민수가 패배했다는 것은 혁명군의 한 축을 담당했던 그의 퇴장을 의미한다.

이제 혁명군에는 이성계를 제어할 힘을 가진 세력이 없어진 셈이다.

조민수는 권좌에서 물러나 창녕으로 귀양길에 올랐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하지만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의 숙청과 너무나 닮아있다.

이성계 진영에서 토지개혁을 들고 나온 것은 두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첫째가 착취구조를 개선하여 고려 사회를 점진적으로 개혁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또 하나는 뚜렷한 비전 없이 혁명세력에 무임승차한 조민수의 제거였다.

조민수는 공민왕이 설정해놓은 친명외교노선을 버리고 친원정책을 표방한 수구꼴통

'이인임'계 로서 토지주를 보호하려 했었다.

총론에서 공감하지만 각론에서 대립하는 유학자들

조민수를 마지막으로 구파 군벌은 말끔히 청산되었다.

조정의 제신들도 대부분 성리학을 공부한 학자들로 채워졌다.

마지막 군벌 이성계 하나만 제외하고 불교국가에서 유학자들의 세상이 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혁명적인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더 많은 결과를 기대했고 더 빠른 변화를 요구했다.

다행스럽게도 이성계는 구시대 군벌이었지만 유학자들과 대화가 통했다.

케케묵은 구닥다리 군인이지만 새로운 사상과 학문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진중에서

성리학을 틈틈이 공부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유학자들에게 있었다.

도덕성으로 무장한 유학자들이 "고려를 구하자"는 총론에서는 공감했지만 방법론에서는

생각을 달리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고려 왕조는 지켜야 한다"는

이색과 정몽주, 이숭인을 주축으로 한 수호파와

"뼈를 깎는 개혁만이 살 길이다. 개혁가지고 안되면 혁명도 불사한다"는

정도전, 조준 등의 급진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며 각을 세웠다.

병권은 이성계의 손에 있었지만 문인 우위의 균형아래서 서로를 감시하는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상대의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이방원의 정보망을 긴장시키는 것은 이색 진영의 결집력이었다.

이색 진영에 이숭인, 정몽주, 김구용 등이 뻔질나게 드나들며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방원의 안테나에 정확한 것이 걸리지 않아 애를 먹고 있는데 희미하게 포착된 것이 있었다.

명나라 사신이 두 팀으로 짜여 진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왜? 갑자기 두개 팀으로 구성되어야 하는지 아리송한 일이었다. 도저히 분석이 안 되었다.

평소 한 개 팀이 모든 업무를 소화하는 사신 길에 복수의 팀이 시차를 두고 떠난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정보를 가지고 아버지와 상의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갑자기 커버린 것을 실감한 이방원

방원은 등청에 앞서 아버지 사제를 찾아 집을 나섰다.

추동 집을 나와 십자로에서 숭인문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불과 며칠 전, 아버지의 회군 소식을 접했을 때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던 길인데

감회가 새로웠다.

선죽교를 건넜다. 이른 아침이라 골안개가 피어오르고 평화스러워 보였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자신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우선 만지는 정보의 성격부터 달랐다. 전리정랑직 자체가 관리들의 인사문제를 다루는

직책이라 사람에 관한 정보를 다루는 것이 주 업무였지만 지금 만지는 정보에 비하면

소소하기 짝이 없는 미미한 것들이었다.

말 잔등에 몸을 맡기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어느덧 어배동에 도착했다.

"명나라 사신문제로 소자가 거론되거든 아무 말씀 마시고 받아두십시요.

덕분에 명나라 구경 한 번 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계를 만나자 마자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얘기했다.

뜬금없이 사신이야기가 튀어나오고 명나라 이야기가 튀어나오니 이성계는 무슨 영문인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이 가을이다. 되짚어보니 하정사가 거론될만한 시기였다.

중국의 황제가 있는 곳은 금릉(남경)이다.

고려 개경에서 8000리 길. 새해 인사를 하려면 10월 이전에는 개경을 출발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에 사신을 정기적으로 보내는 것을 1년 3사라 하여

중국 황제에게 신년 인사를 올리는 하정사(賀正使),

황제의 생신을 축하하는 성절사(聖節使),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춘추사(春秋使) 등이 있었으며

부정기적으로 사은사, 동지사, 주청사, 계품사 등의 이름으로 사유가 발생했을 때

수시로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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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원이 아버지 이성계의 집을 다녀간 바로 그날 궁성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9살 어린 창왕을 용상에 앉혀놓고 하는 회의다. 회의는 문하시중 이색(李穡)이 주도했다.

좌중의 대신들을 휘둘러보던 이색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 하정사(賀正使)에는 내 직접 다녀와야겠소이다.

이숭인을 부사, 전리정랑 이방원을 서장관 삼아 다녀올 테니 그리 아시오."

 

 

  

 

 

군소리 내지 말라는 이색의 폭탄선언이었다.

의견을 구하는 회의가 아니라 결정을 통보하는 회의다.

왕과 신하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안이 벙벙할 뿐 아무 말도 못했다.

60세의 노구를 이끌고 장장 8천리 금릉(남경)을 왕복하는 사신 길을 직접 다녀오겠다는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색의 발언은 가히 메가톤급이었다.

이번 하정사는 금릉에 있는 천자(天子)에게 새해 인사를 올리는 것이 명분이지만 최근의

위화도 회군과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옹립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야 한다.

그러잖아도 공민왕의 죽음에서부터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명나라에게 노련한

외교술이 필요한 시기였다.

이렇게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사신에 이색이 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감국과 신탁통치가 무엇이 다를까?

젊고 유능한 인재가 많음에도 이색 자신이 직접 이방원을 대동하고 명나라를 다녀오겠다고

배경에는 2가지의 숨은 그림이 있었다.

 

첫째는 명 태조 주원장에게 직접 전할 비장의 메시지가 있었다.

고려 감국(監國)이다. 주권국가의 신하로서는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두 번째는 자신이 없는 동안에 있을 수 있는 이성계의 책동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포석이

깔려있었다.

군부세력에서 일고 있는 '이성계 추대론'이다.

자신이 조정을 비우고 있는 동안 이성계세력이 창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에 쐐기를 박아두기 위하여 이방원을 차출한 것이다.

"전리정랑의 일은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오니 본인으로 하여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시중(副侍中)도 알아두셔야 할 일이기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묘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이색의 말에 이성계는 언짢았다.

회군의 진정성은 커녕 반란의 상습성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는

이색의 눈초리가 안면에 와 닿을때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불쾌한 느낌이었다.

비록 왕명을 어기고 회군하여 최영장군을 숙청하고 우왕을 폐했지만 국가의 원로 대접으로

이색을 문하시중에 밀어올린 사람이 이성계다.

그 장본인으로부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모욕과 견제를 당하고 있다'라고 받아들인

이성계는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인사가 잘못되었다고 토로하는 심정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인물은 인재 흉년에 빛난다

이로 미루어 보아 혁명 와중에 있는 고려 조정에서 문신(文臣)들의 발언권이 예상보다

강력했음을 의미한다.

왕명을 거역하고 회군한 세력이 멀쩡히 살아있는 조정에서 이렇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뱃심이다.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도덕성으로 무장한 선비만이 펼칠 수 있는 기개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최고회의 의장이나 국보위 상임위원장에게 이런 배짱으로 나온 민간

관료가 있었는지 의아스럽다. 남산이나 서빙고가 두려워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명나라 사행 길에 이방원을 데리고 가겠다는 이색의 발표는

이성계에게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태평성대라면 이제 약관 21세의 정5품 관리가 비록 정사(正使)나 부사(副使)는 아니지만

천자(天子)를 알현하는 사신에 발탁되었으니 개인은 물론 가문의 영광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행 길에 이방원을 포함시킨 것은 그의 능력을 인정해서 라기 보다

문하시중이 없는 동안 이성계의 모반을 방지하기 위한 인질이었다는 것을 간파한

이성계는 노회한 이색에게 희롱 당하는 기분이었고 벌레 씹은 심정이었다.

이성계는 두 번 놀랬다.

사행단을 이끌고 직접 금릉(남경)에 다녀오겠다는 이색의 발언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도대체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색이 명나라에 들어가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됐다.

두 번째는 방원의 말이 적중하는 데서 오는 전율이었다. 방원의 정보력에 놀라울 뿐이었다.

미더움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방원은 그 비밀을 어떻게 알아내고 미리 귀띔을 해줬단 말인가?

이성계는 앞 통수를 얻어맞은 듯했고 귀신에 홀린 듯했다.

고려와 중국과의 관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사대관계이며 조공국 관계였다.

원나라가 대륙의 맹주로 군림할 때는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이 되어 머리를 조아렸고

신흥강국 명나라가 대륙의 패자로 떠오르자 친명, 배명을 오락가락하며 갈팡질팡했다.

결과는 친명으로 귀결됐지만 고려의 치부를 드러낸 행태였다.

약소국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며 비굴함이다.

철령위를 세우겠다는 명나라의 통보에 요동을 정벌하겠다고 출병한 것이 불과 5개월 전이다.

명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명(命)에 반발하며 기어오른 셈이다.

비록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국경을 넘지는 않았지만 소국이 대국을 넘본다는 것만으로도

괘씸죄에 해당한다.

거기에 더하여 상국의 허락 없이 왕을 마음대로 갈아치웠으니

대국의 자존심을 건드렸을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죽 끓듯이 변하는 것이 명 태조 주원장의 성격이다.
어떻게 나올지 예측불허다.

북방에서는 원나라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다. 전쟁피로증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

더구나 그의 심복 좌승상 호유용을 처형하면서 연루자 1만 명을 죽인 주원장은 정신상태가

피폐해져 있었다. 고려의 사신이 연금되거나 처형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호구에 이색이 들어가겠다니 기이한 일이다.

이성계는 언젠가 이 문제가 거론되어 자신에게 명나라에 들어가 줄 것을 요구하는 의견이

모아지면 단연코 거절할 심산이었다.

헌데 자청해서 이색이 들어가겠다니 그 속셈을 알 수가 없었다.

이색의 복안도 복안이려니와 그와 함께 떠나는 방원이 무사히 다녀올까 그것도 걱정이었다.

아무래도 무슨 복심(腹心)이 있는 것만 같았다.

기개 있는 선비가 군부세력에게 띄우는 마지막 승부수

이색은 혁명세력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하정사(賀正使)+주청사(奏請使) 카드다. 사신으로 떠나기 직전 이색은 이숭인을 불렀다.

"우리가 금릉으로 떠난 직후, 별도의 사신이 떠나서 우리보다 먼저 황제를 알현하는데

차질이 없도록 하시오."

"네, 분부대로 밀직사 강준백을 정사, 이방우를 부사로 선정하였습니다.

심양 길을 피하고 지름길을 택하여 먼저 당도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부사에 이방우라… 절묘하군요. 인물을 잘 골랐습니다."

이방우가 누구인가. 바로 이성계의 맏아들이다.

이색 진영에서는 하정사에 이방원, 주청사에 이방우를 대동하여 이성계를 2중으로

견제하겠다는 심산이었다.

"황제를 알현하는 소임에 착오가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고려 국왕이 친조(親朝) 하라는 명을 꼭 받아내라 하였습니다."

무서운 책략이다.

아무리 사대관계에 있는 중국과 고려의 관계라 해도 9살 어린 왕이 8천리 길 남경에 찾아가

황제 앞에 머리를 조아려 왕으로 인정받고 눈도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차하면 고려라는 나라를 통째로 명나라에 갖다 바치는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군사반란세력 앞에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운 고려를 지키기 위한 고육책이지만 주권국가

로서는 선택해서는 아니 될 하등 책략이다.

 

 

 

 

 

변방의촌뜨기 방원, 금릉에 가다

 

하정사 일행은 고려의 유민들이 향수를 달래며 모여살고 있는 고려촌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오랫동안 헤어졌던 친구를 만난 것과 같은 따뜻한 정이 담긴 환대였다.

청국장에 밥 먹어본 것이 언제였나 싶었다.

잃어버린 고향을 오랜만에 찾아온 거와 같은 정겨운 대접을 받고 하룻밤 푹 쉰 다음

발길을 재촉했다.

연교보와 파리보(巴里堡)를 지나 드디어 북경에 입성했다.

압록강에서 2030리 39일 만이다. 하지만 북경은 황제가 있는 수도가 아니었다.

황제는 그보다 남쪽 금릉(남경)에 있었다.

명 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이 연왕(燕王)이라 칭하고 다스리는 북방의 큰 고을에 불과했다.

대륙의 정복자 원나라를 북방으로 밀어내고 중원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주원장은 26명의

아들이 있었다.

광활한 대륙을 석권한 주원장은 주요 거점을 아들들에게 할양하여 통치하도록 했다.

그 넷째 아들 주체(朱棣)에게 왕으로 봉해준 곳이 오늘날 북경이며 그 당시에는 북평부

(北平府)라 불리었다.

훗날, 조카 혜제를 폐하고 왕위에 오른 주체는 영락제가 된다.

몽고족에게 짓눌렸던 설움을 털어버리고 한족(漢族)의 웅비를 준비하며 생동감 있게

발전하고 있는 북평은 인상적인 도시였으나 지체할 수 없었다. 아직도 갈 길이 바쁘다.

북평에서 심양 가는 거와 비슷한 1400여리를 더 가야 금릉에 닿는다.

명분이 하정사이니만큼 새해가 되기 전까지 금릉에 도착해야 한다.

사신 일행은 발길을 재촉하여 남행길에 올랐다.

 

 



하정사보다 먼저 황제를 알현하여 '친조' 청하라

 

 

 

한편, 이색을 정사로 한 하정사(賀正使) 일행이 산해관을 통과하던 11월 초순.

개경에서는 이색의 밀명에 따라 또 하나의 사신이 출발했다.

강준백을 정사로 하고 이방우를 부사로 삼은 주청사(奏請使) 일행이다.

이방우는 이성계의 맏아들이다.

군부의 실력자 이성계를 견제하기 위하여 두 아들이 명나라 사신에 차출된 것이다.

이들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명 태조 주원장으로 하여금 "고려 국왕은 친조(親朝)하라" 는

명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나이 어린 창왕이 주원장의 눈도장을 받아야만 군부세력으로부터 고려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생각한 이색의 전략이었다.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넌 주청사 일행은 요동에 도착했다.

도총관에게 황제를 배알(拜謁)하러 가는 사신임을 통보하고 곧바로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정사 보다 먼저 금릉에 도착하기 위해서다.

멀리 우회하는 육로 심양을 피하여 지름길을 택한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해로였다.

주청사 일행은 대련에서 뱃길을 이용하여 발해만(渤海灣)을 따라 남행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우리나라에서 직항로를 이용하여 서해를 건너면 될 일을 왜 발해만으로 돌아가느냐고

의아해 할 수 도 있다.

그 이유의 첫째는 요동에서 사신입국을 통보하는 것이요, 둘째는 바다에 대한 공포감이다.

바다 끝으로 나가면 낭떠러지에 떨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상존한 시대였으므로

조그만 객선(客船)으로 대해를 횡단하는 것은 곧 죽음의 길로 인식되었다.

바다는 무섭다, 그래도 지름길을 택하라

이로부터 104년이 지난 후,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하고 마젤란이 태평양을 횡단하는

시대였으므로 선박 건조술이나 항해술이 미약했다.

 

물론 당나라의 수군이 고구려를 공략할 때 서해를 횡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전선(戰船)

었으며 함대를 이루었다.

어부들이나 조그만 배를 탄 사람들은 시야에서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 공포감에 휩싸였다.

당시 사신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뱃길을 이용하는 것을 금기시 했다.

위험한 뱃길에서 불의의 사고라도 당하면 황제에게 바치는 표문(表文)과 봉물이

훼손되는 것을 불경(不敬)으로 간주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보다 표문을 더 중하게 여겼다.

대련에서 조그만 배에 몸을 실은 일행은 발해 연안을 따라 남행을 계속했다.

강소성 어귀에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남경에 도착하여 황제를 알현했다.

하정사 일행이 금릉에 도착하기 전에 황제를 알현하라는 이색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황제를 알현하고 떠난 직후 하정사 일행은 금릉(남경)에 도착했다.

고려의 촌뜨기 이방원의 눈에 비친 금릉은 별천지였다.

문명이 꽃피는 세계의 중심 명나라의 수도 남경은 분명 딴 세상이었다.

고려의 젊은이들이 동경하는 금릉에 21살 청년 이방원이 서있는 것이다.

황제가 있는 금릉에 두 발을 딛고 서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서장관의 신분을 떠난 일개 자연인으로서 이방원은 가슴이 뛰는 흥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천하의 명당에 자리 잡은 신생국

사통팔달로 뚫린 도로는 수레 30여대가 한꺼번에 통과할 수 있으리만큼 넓었으며 길은 돌을

깔아 포장되어 있었다.

집들은 금색과 적색으로 화려하게 치장하였으며 길가에 늘어선 점방에는 갖가지 물건들이

그득그득 싸여 있었다.

한족(漢族)이 6조(朝)조에 걸쳐 도읍지로 선택했던 고도(古都)임을 말해주듯이 고색창연했다.

동쪽에 있는 종산(鐘山)과 서쪽 구릉 완남(晥南)에 안겨있는 금릉은 일국의 수도로서 손색이

없었다.

이방원은 삼국지를 읽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무릎을 쳤다.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호걸 손권(孫權)이 오(吳) 나라를 세울 때 도읍지로 왜 금릉을 선택했는지

그 탁월한 혜안에 탄복했다.

그 뒤를 이어 동진(東晋), 송(宋)나라, 제(齊)나라, 양(梁)나라, 진(陳)나라, 남당(南唐) 등

새로운 왕조를 열어나간 중국의 군주들이 대륙 천지에 하고많은 땅들을 놔두고

금릉에 도읍지를 정한 이유에 대하여 공감이 갔다.

종산은 예전에 자금산(紫金山)이라 불렀으나 초(楚)나라 위왕(威王)이

월(越)나라를 대파하고 금릉을 바라보니 제왕의 기가 서려있어 그 기를 누르고자

금으로 만든 인형을 묻어 그 왕기를 눌렀다 하여 종산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예부 관원의 설명을 들었을 때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마디로 금릉은 천하의 명당이었다.

태어난 지 불과 20년밖에 되지 않은 명나라이지만 참으로 좋은 곳에 도읍지를 정했구나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렇게 좋은 터에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명나라는 욱일승천 하겠지만 한편으로 고려는

한동안 시달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우울했다.

위풍당당 금릉성을 바라보고 위압감에 눌렸다

동쪽에 우뚝 솟아있는 종산(鐘山)을 중심으로 높이가 60여척(20여m)의 성벽이 100여리

(33.67km)에 달하는 금릉성은 웅장했다.

고려의 석성과 달리 벽돌로 쌓은 것이 이채로웠다.

 

한 장 한 장 쌓아올린 벽돌에 벽돌을 만든 사람과 벽돌을 쌓은 사람의 실명을 기록해둔 것으로

보아 축성 당시의 공포감을 엿볼 수 있었다.

가로 300척(90m) 세로 420척(128m)에 4중문으로 되어있는 중화문(中華門)을 바라보았을 때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 웅대함에 개경에서 크다는 숭인문이나 선의문은 민가에 있는 솟을대문 정도로 여겨졌다.

전체 3층으로 되어있는 중화문은 병사들이 걸어서 오를 수 있는 계단이외에 상층까지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는 마도(馬道)가 별도로 개설되어 있었다.

말을 타고 문루에 오른다는 것은 상상해보지 못한 기발한 구조였다.

좌우로 열리는 갑문형 천급갑문(天及閘門)은 변방의 촌뜨기를 주눅 들게 하는 위압감이었다.

적이 침입했을 때 아치형의 통로 위에서 통째로 문이 내려오는 장병동(欌兵洞)은 이곳이

황제가 있는 요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황성의 정문 중화문을 통과할 때는 그 무엇인지 모를 중압감이 어깨를 짓눌러 왔다.

대종정(大鐘亭)에는 몇 개월 전에 완성한 높이 14척(4백27cm), 구경 7.5척(2백29cm)에 무게가

자그마치 3만8천근(23t)이나 되는 거대한 종이 매달려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높이 100척(30m)에 이르는 고루(鼓樓)에 큰 북이 매달려 있었는데 성내 어디

에서도 북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가히 대국다운 풍모였다.

 

 

 
 
 
 

낙마해도 만인이 우러러 볼 것이오

[태종 이방원]배신과 음모가 춤을 추는 첩보전

 

운명의 시간이 시시각각 밀려오는 것을 알 길이 없는 공양왕은 찻잔속의 태성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창릉을 개축하고 해온정을 새로 지었다.

신년 하례를 위하여 세자 석(奭)을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보냈다. 황제를 조현(朝見)하고

눈도장을 받기 위해서다.


1392년 초하루. 임신년 새해가 밝았다.

수창궁에서 공양왕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있는 금릉(남경)을 향하여

하례를 올리고 연회를 베풀었다.

임금이 베푸는 연회에 참석한 신료들은 마음이 불편했다.

혁명세력과 수구세력이 서로를 감시하고 염탐하는 자리라 긴장감이 감돌았다.


세자가 돌아오는 날. 공양왕은 이성계로 하여금 세자를 마중 나가도록 명했다.

퇴궐한 이성계는 방원을 사저로 불러들였다.

방원의 정보력과 순발력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모든 일을 상의하는 입장이었다.

이성계에게 있어서 방원은 아들이라기보다 혁명으로 가는 길의 둘도 없는 동지였다.


“왕이 날더러 세자를 영접하라 명하시니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공양왕과 정몽주 사이에 비밀한 일이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부자지간에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상황에서는 왕도 정몽주도 존칭의 대상이 아니었다.

당시 정몽주는 문하시중, 이성계는 수 문하시중 이었다.

현대적인 의미로 풀이하면 정몽주는 총리였고 이성계는 부총리였다.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겠느냐?”

“해괴한 첩보를 접수하였습니다만 아직 속내를 정탐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

거미줄처럼 쳐놓은 방원의 첩보망에 뭔가 포착되었지만 핵심을 분석하지 못한 상태였다.

왕실 보호세력은 얼마 전 궁정연회에서 이성계를 도모하려는 계획이 누설되어 수포로 돌아간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보안 유지를 단단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염려하지 마라.”

“아버님께서 개경을 비우지 않는 것이 타당한 줄로 사료되옵니다.”


“됐다. 아버지가 고려의 군권을 틀어쥐고 있는데 누가 감히 도전해 오겠느냐. 세자도 영접하고

막간을 이용하여 사냥도 즐기면서 심신을 좀 쉬려 한다.”

“그래도 아버님께서 개경을 비우시는 것은 위태롭습니다.”  


“개경에는 네가 있지 않느냐. 너만 믿고 다녀오마.”


이성계는 자만하고 있었다.

고려 5군을 3군으로 재편하여 도총제사에 앉아있는 자신에게 도전할 자는 아무도 없다고 자신

하고 있었다.

이성계는 방원의 만류를 뿌리쳤다.

하지만 이성계가 믿었던 방원은 개경을 지키고 있지 않았다.

지난해 9월 돌아간 어머니 한씨의 묘가 있는 개풍에서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다.


덕을 잃은 왕조는 백성이 폐하여도 된다


이성계와 한씨는 부부다. 강씨는 제2부인이다.

한씨와의 사이에 6남매를 두었는데 한씨가 별세하자 묘 앞에 초막을 치고 아들들이 번갈아

가며 시묘살이를 했다.

때마침 방원의 차례가 되어 방원이 여막(廬幕)살이를 하고 있었다.


시묘살이 하면서 틈틈이 독서에 몰입했다.

이 때 빠져든 책이 정도전이 전해준 <맹자>다. “덕을 잃은 군주는 신하가 폐 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당시로는 불온한 책이다.

방원은 이 책을 탐독하고 책장이 헤지도록 정독했다.


책을 읽어 내리면서 ‘덕을 잃은 군주는 신하가 폐하여도 된다.’는 맹자의 말씀을 뛰어넘어

“덕을 잃은 왕조는 백성이 폐하여도 된다.” 라는 신념으로 비약하고 있었다.

고려를 폐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데 마지막 걸림돌은 정몽주라 지목하고 작은 아버지

이화와 정몽주 제거계획을 논의하고 있었다.


방원이 빠져든 <맹자>는

정도전이 낙향하여 시묘살이 할 때 정몽주가 정도전에게 전해준 책이다.

천하를 경영하고 싶은 웅지를 품고 있던 정도전의 의식세계에 혁명의 불꽃을 심어준 책이다.

그 책의 칼날이 이제는 정몽주를 향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하다.


말에서 떨어져도 만인이 우러러 받든다?


“송구한 말씀이오나 가시는 발걸음을 붙잡고 싶은 심정이옵니다.”

이성계가 집을 나서 말에 오르려는데 부인 강씨가 따라 나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아주 영영 떠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 같소이다. 허허, 그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소?”

“방올이에게서 점괘가 나왔는데 실족하여 땅에 이른다 하옵니다.”

방울(方兀)이는 강씨가 총애하는 이성계 집 전속 무당이다.


“길 떠나는 사람에게 무슨 망측한 소리요. 쓸데없는 소릴랑 거두시오.”

“길에 떨어졌는데 만인이 모여 받든다 하니 더욱이 모를 일입니다. 부디 몸조심 하옵소서.”

이성계는 말에 올라 황주로 향했다. 말 잔등에 앉아 부인 강씨가 한 말을 곱씹어 봤다.


“낙마했는데 만인이 모여 받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풀리지 않은 숙제였다.

쓸데없는 생각이라 치부하며 떨쳐버리려 해도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황주에 나아가 세자를 영접한 이성계는 돌아오는 길 해주에서 여흥으로 사냥을 즐기다

말에서 떨어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중상이었다.


마지막 승부수를 띄워라


이 소식은 곧바로 개경에 전해졌다.

이성계의 중상소식을 들은 문하시중 정몽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때는 바로 이 때다. 하늘이 내려준 기회다”

왕명을 거역하고 위화도에서 회군한 반란군 수괴 이성계를 제거할 시기는 바로 이때다 싶었다.

반란군 괴수 이성계를 처단하여야 인륜이 바로서고 왕실이 바로 선다고 생각했다.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간(臺諫) 김진양을 불렀다.


“먼저 이성계의 보좌역인 조준 등을 제거한 후에 그를 도모할 것이다.”

정몽주의 사주를 받은 김진양은 상소문을 올렸다.

공양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도당(都堂-도평의사사)에 명했다.


“삼사좌사(三司左使) 조준,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도전, 밀직부사(密直副使) 남은,

판서(判書) 윤소종, 판사(判事) 남재, 청주목사(淸州牧使) 조박을 유배형에 처하라”


공양왕의 명이 떨어졌다.

이성계의 오른팔 왼팔을 잘라내는 전격적인 조치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정몽주의 심복 김귀련과 이반을 조준, 정도전, 남은의 귀양 간 곳으로 나누어 보내어

그들을 국문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정몽주의 대 반격작전이었다.

 

개경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국 속에서 배신과 음모가 뒤따르는 첩보전이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정몽주가 일을 이렇게 전격적으로 진행시킨 것은 방원 진영에서 흘러나온 정보 때문이었다.

방원은 아버지의 이복동생 이화(李和)와 정몽주 제거계획을 은밀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이 음모를 전해들은 아버지의 이복형 이원계의 사위 변중량이 정몽주에게 고해 바쳤다.

이 소식을 접한 정몽주가 당하기 전에 회심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

마지막 승부수였다.

 


 

 

안개 정국 속의 돌파구를 찾아라
[태종 이방원]혁명전야
 

벽란도의 여름, 노을이 내리다

벽란도는 섬(島)이 아니고 나루터다.

개경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목이며 대륙과 연결되는 국제 항구다.

중국 산동반도 등주에서 출발한 명나라 화물선이 서해바다 직항로를 건너 예성강 하구에서

거슬러 올라왔다.

돌아갈 때는 고려의 특산물을 싣고 자연도, 마도, 고군산도를 거쳐 명주로 갔다.

 

 

 

중국의 사신이 들어오면 우벽란정에 조서를 안치하고 좌벽란정에 사신을 유숙케 했다.

융숭한 대접은 기본이고 객고도 풀었다.

사람과 물산이 빈번히 오고가는 길목이라 상업이 발달하고 유곽이 번창했다.

 

벽란도는 재화가 유통되는 국제항구이며 고려 왕국의 관문이었다.

이러한 벽란정이 있는 나루터라 하여 벽란도(碧瀾渡)라는 이름을 얻었다.

날아가는 새를 쫓다 말에서 떨어져 크게 몸을 다친 이성계는 개경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벽란도에 머물렀다.

말을 타지 못하고 교자(轎子)에 실려 오는 중상이었으므로 몸을 추스르기 위한 요양이었다.

 

무녀 방올이의 예언이 적중했을까? 전화위복의 산고일까? 운명의 시각은 다가오고 있었다.

이성계가 없는 정국은 반전을 노려 급박하게 돌아갔다.

개풍에서 여막살이 하던 방원에게 이제(李濟)가 찾아왔다.

이제는 권신 이인임의 아우 이인립의 아들로 이성계의 셋째 딸과 혼인하여 방원과는

처남매부지간 이다.

 

훗날 이성계를 도와 개국공신이 되었으나 정도전과 함께 방석을 옹립하려다 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저들이 정도전과 조준을 죽이려 합니다."

정몽주는 탄핵을 받아 귀양 떠난 정도전과 조준이 있는 귀양처에 김귀련과 이반을 파견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현장에서 왕명으로 국문(鞠問)하여 처형하려는 계획이었다.

이 소식을 정탐한 이제는 부리나케 속촌(粟村)의 여막으로 방원을 찾아온 것이다.

"몽주는 반드시 우리 집에 이롭지 못하니 마땅히 이를 먼저 제거해야 되겠다."
"예! 예! 지당한 말씀입니다."

이제로부터 개경 소식을 전해들은 방원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비켜갈 수 없는 운명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방원은 주먹을 불끈 쥐며 결의를 다졌다.

이제 죽고 죽이는 순간이 아니라 먹고 먹히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가자, 아버님이 계신 곳으로 가자."

두 사람은 말에 올라 말채찍을 꼬나 쥐었다. 채찍에 놀란 말이 질풍처럼 달렸다.

벽란도에 도착한 방원은 황급히 이성계를 찾았다.

"저들이 정도전과 조준을 죽이고 나면 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을 모함할 것입니다."

분기탱천한 방원이 목소리를 높이며 위기를 알렸다.

잠자코 듣고 있던 이성계는 아무 말이 없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방원의 얘기를 들을 뿐이었다.

"개경으로 들어가셔야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묵묵부답이었다. 방방 뛰는 방원을 지긋이 내려다 볼 뿐이었다.

방원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처남은 뭐하는가? 어서 빨리 아버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세."

아버지의 의지를 꺾는 강제성이 발동되었다.

돌아가지 않겠다는 아버지를 설득할 시간이 없었다.

방원으로서는 아버지의 의지에 반하는 최초의 역행이었다.

돌아가지 않겠다는 아버지를 교자에 강제로 태워 집으로 돌아왔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쳐왔다

숭교리에 돌아온 이성계는 사태파악에 나섰다. 위기였다.

정몽주가 대간을 동원하여 조준과 정도전을 처형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급한 상황이었다.

우선 아들 방과와 동생 이화의 사위 이제 그리고, 황희석과 조규 등을 대전에 보내어

공양왕에게 자신의 진정을 전하도록 했다.

"지금 대간(臺諫)은 조준이 전하(殿下)를 왕으로 세울 때에 다른 사람을 세울 계책이 있었는데,

신(臣)이 이 일을 저지(沮止)시켰다고 논핵(論劾)하니 하늘이 두려울 뿐입니다.

조준이 의논한 사람이 어느 사람이며 신이 이를 저지시킨 말을 들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청하옵건대 조준 등을 불러 와서 대간(臺諫)과 더불어 조정에서 변론하게 하소서."<태조실록>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조준과 정도전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시간을 벌고 대질심문으로

진실을 가려보자는 얘기다.

사태를 풀어나가는 성향이 방원은 불같은 성미에 즉흥적이지만 이성계는 달랐다.

즉각과 즉시를 선호하는 무인이었지만 냉정한 머리와 침착한 행동으로 꼬인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성품이었다.

공양왕은 요지부동이었다.
정몽주와 함께하는 마음이 돌아서지 않았다.

몇 차례에 걸친 이성계의 주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준과 정도전의 목숨이 경각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성계가 공양왕을 설득하려는 계획은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방원은 조준과 정도전이 희생당하면 그 다음 표적은 자신과 이성계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성계의 숭교리 사저에서 긴급 대책회의가 열렸다. 모두가 이성계와 한 배를 탄 사람들이었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 누구하나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뜰밖에 여치소리가 들린다. 숨 막힐 것 같은 적막감을 깨며 방원이 입을 열었다.

"몽주를 죽여야겠습니다. 몽주는 우리 집에 화근입니다. 몽주를 죽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것은 최선책이 아니느니라."

이성계의 답은 짧았지만 여운은 무거웠다.

이성계에게 있어서 정몽주는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끌어안고 가야할 인물이었다.

그것은 함주 막사에서 '조선건국사업'의 첫 삽을 뜬 이래 변함없는 생각이었다.

혁명동지 정도전과 이색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이어서 라기 보다 '새나라'라는 한 배를 타고

가야 할 동량(棟梁之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선비를 좋아했던 장군

이성계는 무인(武人)이면서도 문인(文人)과 학문을 좋아했다.

특히 성리학 하는 선비들을 끔찍이 아꼈다.

그들이 추구하는 덕목인 깔끔하고 깨끗한 도덕성에 매료되었다.

따르는 사람도 조준, 정도전, 남은, 배극렴, 정총 등 중량급 문인들이 목숨 걸고 전장을 누볐던

무인들보다도 더 많았다.

이성계는 전투의 막간을 이용하여 진중에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독하기도 했다.

대학연의는 고려의 제왕들이 탐독했던 정관정요(貞觀政要)를 뛰어넘는 책으로 송나라 시대

진덕수가 대학(大學)과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간추려서 편찬한 책으로 성군 세종이

백번도 더 읽었다는 조선최대의 제왕학(帝王學) 교과서다.

자신의 슬하인 방과, 방우, 방원을 비롯한 아들들도 무인의 길을 만류하고 신유학을 공부시켜

조정에 출사시켰다.

무인은 국체(國體)를 보호하고 바람막이 역할을 할 뿐 세상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선비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훗날 등극한 이성계는 조정의 중요 요직에 무인을 배제하고 문인을 전면 배치한 것으로

그의 생각을 현실에 구현했다.

 

헌데, 한국 현대사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정권을 잡은 박정희와 전두환은

군복 입었던 자들을 그대로 등용하거나 옷을 갈아 입혀 기용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대비되는 장면이다.

 

 

 

 

 

 

 

 

범을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가다
[태종 이방원]혁명전야 4
   

"시중각하 큰일 났습니다. 이성계가 지난밤에 벽란도에서 돌아왔습니다."
"뭣이? 돌아왔다고?"

정몽주의 목소리는 거의 신음에 가까웠다.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 낙마하여 교자에 실려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죽거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기를 바랐다.

그의 부상이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그의 오른팔 조준과 왼팔 정도전을 잘라내고 있는데

이성계가 돌아왔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부상은 어느 정도 이더냐?"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듯 하였습니다."
"없는 듯하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 죽겠더냐? 살겠더냐?"

정몽주는 버럭 화를 내었다. 변계량은 머리를 조아리고 아무 말이 없었다.

"채비를 갖추어라. 내가 직접 그의 집에 나아가 이성계를 살펴 봐야겠느니라."

숭교리 이성계의 집을 방문하겠다는 것이다. 발상을 뒤집는 상상 밖의 일이었다.

이성계의 건강상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일의 완급을 조절하고 속도를 조절하겠다는 뜻이다.

정몽주는 의외로 배포가 큰 인물이다.

"아니 되옵니다. 방원이 시중 각하를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고 있습니다."
"뭣이라고? 방원이란 놈이 나를? 고얀 놈 같으니라고….

문병 길에 애송이의 버르장머리도 고쳐줘야겠구나."
"가시면 돌이킬 수 없는 불상사가 일어날 듯 하옵니다. 가시지 마시옵소서."
"범을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잡을 수 있느니라.

뭣들 하는 게냐? 어서 채비를 놓지 못하고."

집을 나선 정몽주

 

정몽주는 집을 나서 말에 올랐다.

그의 방문은 외견상 사냥 하다 낙마하여 부상당한 이성계의 병문안이었지만

내심은 부상 정도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부상 상태에 따라 보주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정도전을 언제 처형 할 것이며

유배지에서 귀양살이하는 조준을 어떻게 처리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다.

정몽주는 선지교를 건넜다. 가지런히 서 있는 시렁돌이 오늘따라 망주석처럼 보였다.

묘각사(妙覺寺)에서 가져왔다는 다라니당(陀羅尼幢)이 유난스럽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가 건너는 선지교(善地橋)를 후세 사람들이 선죽교(善竹橋)라 부르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정몽주가 숭교리 이성계 집에 도착했다. 그가 왔다는 소식에 식솔들은 화들짝 놀랬다.

이성계의 사랑채에 모여 있던 측근들은 정몽주 집에 박아둔 첩자로부터

그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놀라지 않았으나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왔을까?"
"염탐하러 왔겠지…."
"대승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풀어보려고 왔을지도 몰라."

추측은 무성했지만 정확한 핵심은 짚어낼 수 없었다. 방원 역시 그랬다.

서로의 가슴에 칼끝을 겨누고 있는 살얼음판 같은 대치상황에서

정몽주가 아버지를 찾아온 연유를 알 길이 없었다.

"몽주를 죽이려면 이때가 그 시기입니다."
"경거망동하지 말어라."

성질 급한 이화가 즉시 행동에 옮기자고 나섰으나 방원이 다독이고 나섰다.

정몽주를 맞이한 이성계는 비록 환자이지만 예를 다하여 정몽주를 맞았다.

정몽주 역시 정중한 예를 갖추어 문병했다.

쾌유를 비는 문병이었지만 서로의 시선은 싸늘했다.

정몽주가 문병을 마치고 나오는 순간 하인이 정몽주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서방님께서 사랑채로 모시라는 분부이옵니다."
"너의 서방님이 누구이더냐?"
"밀직대언 이방원이옵니다."
"방원이가…?"

정몽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애송이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고 싶었는데 눈에 보이지 않아 그냥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방원이가 보자 하니 잘되었다 싶었다.

하인의 안내를 받은 정몽주가 사랑채에 들어섰다.

앉아있던 방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맞이하며 상석을 권했다.

노 재상과 젊은이의 한 판 대결

마주앉은 두 사람은 말이 없었으나 눈빛에서는 불꽃이 튀기고 있었다.

탱탱한 긴장감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안다.

가슴에 품은 생각까지도 서로 꿰뚫어 보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정몽주는 방원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자신의 몸에 꽂이는 것을 감지했다.

침묵을 깨고 방원이 입을 열었다.

如此亦何如 如彼亦何如(여차역하여 여피역하여)
城隍堂後壇 頹落亦何如(성황당후단 퇴락역하여)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아배약차위 불사역하여)

이런들 긔 엇더리, 뎌런들 긔 엇더하리
성황당 뒤담이 해인들 긔 엇더하리
우리도 이러히여 살어이신들 긔 엇더하리 <해동악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라고

회유하는 솜씨가 제법 세련됐다.

당대의 석학이자 일인지하 만인지상 문하시중 앞에 내놓은 문장 역시 유치하지 않다.

'如此亦何如 如彼亦何如(여차역하여 여피역하여)'이라는 문구가 간결하면서도 절묘하다.

어차피 백년도 못 사는 인생.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려보자는 것이다.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가 던져지듯이 긴장감이 탱탱하던 방안에 파문이 일었다.

방원이 많이 컸다는 것을 느꼈다. 만감이 교차했다.

이제 갓 출사한 '그저 괞찮다'는 젊은이로 알고 있었는데 자신과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을 회유하려 든다는 것이 가소롭기도 했지만 그 기백에 전률마져 느껴졌다.

대척점에 있는 정적이지만 '아들 하나는 똑똑한 놈 뒀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재상의 자리에 있는 자신이 애송이로만 보아왔던 젊은이와 정면 대결을 펼치는 것이

격에 어울리지 않고 초라해 보이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어쩌다 나라와 내꼴이 이 지경이 되었나?"라고 탄식하며 나라가 한심스러웠다.

경멸의 눈빛으로 방원을 바라보던 정몽주가 엷은 조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향주일편단심 영유개리지여) <포은집>

이 몸이 주거 주거 일백 번 고쳐 주거
백골이 진토 되여 넉시라도 있고 없고
님 향 일편단심이야 가싈 줄이 이시랴 <청구영언>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캬, 기막힌 절구다.

이 한 몸 죽고 죽어 골백번 죽어도 어림없고,

백골이 흙이 되어 넋이 있고 없고 고려를 향한 일편단심이 가실 줄이 없으니

나를 설득하려 하거나 회유하려 들지 말라는 준엄한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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