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백범 김구가 "죽일놈"이라고 지칭했다?

기산(箕山) 2024. 12. 1.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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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가 "죽일놈"이라고 지칭했다?
이 독립운동가의 삶

김종성 2024. 11. 30. 19:15

 

3.1운동·신간회 활동, 신사참배 거부한
독립운동가 배은희

 

해방공간의 주요 암살 사건 중 하나는

1947년 12월 2일의 장덕수 암살이다.

 

장덕수는 이날 저녁 6시 50분경

서울 제기동 자택을 방문한

박광옥 서울 종로경찰서 경사와

배희범 연희대학교(연세대) 학생의 총격을 받고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절명했다.

 

20대 초반 청년들인 박광옥과 배희범을 포함한

사건 관련자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여당이자

김구의 정치 기반인 한국독립당의 당원들이었다.

 

이 사건으로 김구는 사법 리스크에 걸렸다.

 

정부수립과 대통령 선거가 추진되는 긴박한 상황에서

그는 증인 자격으로 군사 법정을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이 사건은

1948년 4월 1일 박광옥·배희범을 비롯한 8명에게

교수형이 선고되고 2명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됐다가

존 하지 군정사령관의 결정으로

교수형 대상자가 박광옥·배희범으로 축소되는 쪽으로

마무리됐다.

 

김구를 존경한 '피의자들' 입에서 나온 인물, 

이 재판이 진행될 당시에 거론된 이름이 있다.

 

김구보다 열두 살 적은 배은희(裵恩希, 1888~1966)의

이름이 법정에서 논란이 됐다.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출생해

열일곱 나이로 아버지를 여읜 뒤 방랑생활을 하다가

기독교인이 된 배은희의 이름은

김구가 증인으로 출석한 1948년 3월 12일 제8회 공판 때

거명됐다.

 

변호사 심문에 이어 검사 심문이 끝난 뒤인

그날 오후 재판 때였다.

 

검사는 살인교사를 부인하는 김구 앞에서

피의자신문조서를 낭독했다.

 

그달 13일 자 <경향신문> 4면 좌단에 의하면,

신문조서 속의 피의자들은

"김구 선생은 장덕수와 배은희는 죽일 놈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장덕수, 명제세, 배은희는

이 박사 밑에서 일을 하면서 소란케 하는 자이니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등등의 말을 했다."

 

 

▲ <경향신문> 1948년 3월 13일 자 기사

'金九氏(김구씨)·證人審問廷(증인심문정)에'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김구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단호히 부인했다.

 

김구의 이 발언과 함께 고려돼야 할 것은

피의자들이 한국독립당 당원이라는 점,

이들이 법정에서 김구에게 고도의 존경심을 표했다는 점

등이다.

 

피의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장덕수뿐 아니라 배은희도 암살당할 뻔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진술은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배은희가 장덕수와 같은 편이었기 때문에

김구의 미움을 산 것처럼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독립운동가 배은희와 장덕수는 같은 우파에 속했지만

1947년에는 정치적으로 대립했다.

 

두 사람을 대립하게 만든 당시의 정치 상황은

독립운동가였다가 친일파로 전향한 장덕수가

암살을 당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전주 지역 유지인 배은희가 전국적인 정치지도자로

부각되는 계기가 됐다.

 

1947년에 우파 진영은

2년 전 12월의 모스크바 3상 회의 결론을 놓고

분열을 일으켰다.

 

3상 회의의 결론은

'미소 공동위원회가 한국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며,

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와 협의해

미·소·영·중 4개국에 의한 최장 5년의 신탁통치협정을

체결한다'는 것이었다.

 

친일파 정당인 한국민주당(한민당)과 김성수는

'공동위원회에 참여해 임시정부를 세운 뒤

신탁통치를 거부하자'는 입장을 취했다.

 

한민당은 미군정의 여당이므로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김구와 이승만의 입장은

'신탁통치로 귀결될 공동위원회 참여를 거부하자'

것이었다.

 

김성수의 동지인 장덕수는 공동위 참여를 주도했고,

이승만의 지지자인 배은희는 공동위 불참을 주도했다.

 

이 결과,

장덕수는 반대 진영의 미움을 사다가 암살됐고,

배은희는 불참운동을 발판으로 1947년 하반기에

정치 지도자로 부각됐다.

 

그해 10월 10일 자 <경향신문> 1면 하단은

우파 진영의 단독정부 수립 계획을 논의하는

독촉국민회 전국대표자대회에서

배은희가 거물급 독립운동가인 해공 신익희와 함께

5인의 부위원장단에 들어간 사실을 보도했다.

 

방랑 생활을 했던 배은희가 기독교에 귀의한 것은

대한제국 멸망 2년 전인 1908년 무렵이다.

 

2018년에 <한국교회사학회지> 제50집에 실린

이은선 안양대 교수의 논문

'배은희 목사의 해방 이후 정치활동 연구'는

"20세에 전도지를 받고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

기술한다.

 

배은희의 이후 행적을 보면,

무언가에 한 번 빠져들면 거대한 열정을 뿜어내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갖게 될 수 있다.

 

전도지를 받고 회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그는 1908년 자신의 집에 예배당을 설립"했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그의 열정은 계속 이어졌다.

달성·경산·청도 등지에서 전도활동에 나선 그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경주 계남교회에 이어 전주 서남교회에서 목사로 일했다.

 

목회 활동과 함께 유치원·야학 등의 교육 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꿋꿋하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거부

 

▲ 일제시대 신사참배하는 모습.

배은희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가 고초를 겪었다.

ⓒ 연합뉴스

 

 

배은희의 신심은

'일왕과 하나님 중 누구를 믿을 것이냐?'라는 물음 앞에서도

대체로 꺾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일제의 강요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받아들였지만,

그는 이를 거부해 야학이 폐교되고 유치원이 넘어가고

그 자신이 감옥에 들어가는 고초를 겪었다.

 

그의 회고록인 <나는 왜 싸웠나?>에 근거한 위 논문은

"중일전쟁 후에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김가전과 최서양과 함께 투옥되었다 풀려났다"라고

말한다.

 

신사참배에 대한 그의 저항은 잠시 흔들렸다.

 

"1941년 태평양전쟁 후에 다시 투옥되어

가족을 모두 투옥하겠다는 협박에 못 이겨

강제로 한 번 신사참배를 했다"고 논문은 말한다.

 

그러나

"그 후에 11일간 금식하며 회개하였다"라고 한다.

 

그의 목회 활동은 1943년에 중단됐다.

일본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목사 활동을 계속하기는

쉽지 않았다.

 

신앙에 대해 나타난 그의 열정은

민족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났다.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대한제국 멸망 직후 일제의 병합에 항의하다가

잠시 투옥됐다.

 

그는

이 사건이 자신의 독립운동에 밑거름이 됐다고 평가했다.

 

"독립운동에 몸을 바쳐 피의 투쟁을 한 종자가

그때 뿌려졌던 것"이라고 그는 회고했다.

 

31세 나이로 맞이한 1919년 3·1운동 때는

신학생 신분으로 평양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때문에 태형 40대를 맞았다.

 

풀려난 뒤에는 매 맞은 하체를 끌고

대구·부산·청도 등에 가서 또 만세를 외쳤다.

 

그런 열의는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에 대한

참여로 이어졌다.

 

신간회가 창립(1927.2.15)된 해에 보도된

그해 5월 13일 자 <조선일보> 1면 좌중단은

전주 지역 신간회 준비위원장인 배은희가

이틀 전에 신간회 전주지회를 창립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보도했다.

 

배은희의 열정은

해방 뒤 한동안은 이승만에 대해 나타났다.

그는 이승만을 열렬히 지지했다.

 

미소공동위 참여를 놓고 우파 정치권이 분열됐을 때도

이승만 편이었다.

 

김구가 "죽일 놈"이라고 말했다는 진술이 나온 것도

그가 이승만의 충실한 지지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1948년 정부수립을 즈음해

이승만이 자기 정당을 갖기를 원했을 때는

목요회라는 모임을 이끌며 정당 건설에 앞장섰다.

 

또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 3년 만인 1951년에

자유당이라는 여당을 갖게 됐을 때는

이 당의 핵심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기붕이 이승만의 신임을 바탕으로

자유당 당권을 잡는 과정에서

그는 이 당과 멀어지다가 결국 떠나게 됐다.

 

1955년 12월 25일 자 <경향신문> 1면 중하단은

"아직 자유당에 당적을 가지고 있던 배은희가

이틀 전에 탈당했다"고 보도했다.

 

이승만의 충성스러운 지지자였던 그는

민족과 신앙을 대할 때만큼의 열정을

이승만에게 보이지는 않았다.

 

배은희는

1951년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

1954년 총선 때는 대구 갑구에서 낙선했다.

 

1966년 2월 7일 자 <동아일보> 3면 좌하단은

"자유당 창당 때의 최고위원이었던 배은희씨는

5일 오후 대구시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라고

보도했다.

 

배은희는

국가보훈부가 지정한 독립유공자는 아니지만

존경받을 만한 행적을 많이 남겼다.

 

신사참배에 대한 태도는

대부분의 목사들과 비교하면 매우 드문 편에 속한다.

 

또 3·1운동과 신간회 활동으로도 독립운동에

많이 기여했다.

 

친일청산기구인 국회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킨 이승만과

곧바로 절연하지 않고

수년간 같은 길을 걸은 것은 그의 흠집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