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 舞蹈史 [庾祐鳳] 유우봉 (전 한국댄스스포츠연맹 회장)
I. 총론
1. 무도의 개념
가. 예술사론적 해석
나. 명칭의 변천
2. 접근 방법
가. 역사 의식
나. 시대 구분법
II. 각론- 시대별 약사
1. 대한 제국 시대 (1897 ~ 1910)
2. 일제 강점 시대 (1910 ~ 1945)
3. 미군정 시대 (1945 ~ 1948)
4. 대한민국 시대 (1948 ~ 현재)
가. 1950 년대
나. 1960 년대
다. 1970 년대
라. 1980 년대
마. 1990 년대
바. 2000 년대
Ⅲ. 연표
I. 총론
1. 무도의 개념
가. 예술사론적 해석
(1) 움직임의 예술
신체적 움직임을 표현의 매체로 하는 운동예술을 오늘날은 움직임의 예술이라고 한다.
현대 움직임 이론의 창시자인 루돌프 라반(Rudolf von Laban, 1879-1958)이후부터이다.
예술의 분류방법은 다양하고 분류기준도 시대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현대에서 무도(舞蹈)는 발레, 현대무용, 연극, 영화 등과 함께 움직임 예술의 하나이다.
무도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아름다움에 있다.
미학의 입장에서 예술은 창조적인 미적 가치의 정감적 표현으로서 사회적 기능을 지닌
문화적 활동이며, 궁극적으로 창조적 표현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예술사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예술현상의 변천과정을 해석하는데,
이 때 시대적 미관(美觀)은 주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동주(李東洲)의『韓國繪畵史』는 그림의 아름다음과 시대적 미관이란 부제를 붙인 총론에서
“인간의 문화적 조건에서 생각되는 모든 예술에서와 같이 그림에서도 미(美)에의 공감과 향수는
필경 문화적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2) 댄스의 연원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발생한 예술은 댄스라고 학자들이 대체로 용인한다.
예술사에서 일원설을 대표하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에 의하면,
“원시시대 처음 발생한 예술은 댄스이며, 모든 예술은 원초적으로 댄스에서 분화․발달했다.
댄스는- 특히 집단적인 댄스는 리듬을 필요로 하므로 여기서 음악이 생기고,
다음에 시가(詩歌)가 발생했다.
신체적 움직임에 의한 표현력은 장식(裝飾) 예술을 발생시킨 원인이기도 했다.”
(3) 커플 댄스의 효시
국제댄스교사협회(IDTA)의『볼룸 댄스 기법(Technique of Ballroom Dancing)』에 수록된
린든 웨인라이트(Lyndon Wainwright)의 연대기에 의하면,
“댄스의 초기 형식은 원무였고 커플이 몸을 접촉하여 춘 것은 영국 엘리자베스(Elisabeth)
1세 때부터이다.
라 볼타(La Volta)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좋아하는 댄스였고, 아마 최초의 커플 볼룸 댄스였다.“
엘리자베스 여왕(1533-1603)이 레스터(Leicester) 백작과 댄스를 추는 모습은
현재 영국 켄트 주 펜스허스트 궁전에 목판 유화로 남아 있다.
나. 명칭의 변천
(1) 볼룸 댄스(Ballroom Dancing)
무도회에서 추는 댄스란 뜻의 볼룸 댄스는 영국에서 1922년 세계선수권대회 이후
경기용 댄스로 발전했다.
국제아마추어무도인평의회(ICAD)와 국제볼룸댄스평의회(ICBD)는
1990년까지 볼룸 댄스란 용어를 사용했다.
(2) 댄스 스포츠(Dance Sport)
댄스의 예술성과 스포츠의 경쟁성을 결합한 댄스스포츠는 올림픽 스포츠의 명칭이다.
ICAD는 1990년 경기용 볼룸 댄스를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하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댄스스포츠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리고 ICAD는 국제댄스스포츠연맹(IDSF), ICBD는 세계댄스와 댄스스포츠평의회(WD&DSC)로
개명했다.
IDSF는 1995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준회원으로 가입했고,
댄스스포츠는 스포츠심리학, 운동역학, 사회체육학, 움직임예술의 특성에 힘입어
올림픽 스포츠가 되었다.
댄스스포츠의 기본 명제는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되는 커플 댄스인데,
그 특성은 다음과 같다.
① 다른 커플보다 잘 추려는 욕구와 함께 아름다움을 겨루는 경쟁성,
② 운동 기술을 바탕으로 운동의 원리에 따라 동작을 수행하는 특성,
③ 심폐기능을 강화하고 멋지고 아름다운 자세를 유지시켜 주는 특성,
④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여 남녀노소가 미적 체험을 공유하는 특성이다. 4)
IDSF는 1997년 6월 8일 파리 총회에서 올림픽 스포츠의 고유 명칭을
댄스스포츠(DanceSport)로 표기하기로 의결했다.
(3) 무도(舞蹈)
현재 댄스스포츠의 행정용어는 무도인데, 추는 목적에 따라 사교무도와 경기무도로 구분하며,
동양의 한자문화권은 모두 무도라고 표기한다.
무도란 명칭은 수지무지(手之舞之)와 족지도지(足之蹈之)의 수무족도(手舞足蹈)에서 유래했다.
수무족도(手舞足蹈)는 몹시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으로 논어집주서(論語集註序)에서는
희열의 경지를 뜻한다.
程子曰: 讀論語, 有讀了全然無事者; 有讀了後, 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 知好之者;
有讀了後, 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
(정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논어를 읽음에 읽고 나서도 전혀 아무 일이 없는 사람이 있다.
그 중 한 두 구절을 깨닫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다. 읽고 나서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읽고 나서 오직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발을 구르는 사람도 있다.)
철학자 김용옥(金容沃)은
“手之舞之足之蹈之”를 선(禪)의 엑스타시(Ecstasy)요, 깨달음의 환희로 해석하고,
출전을『禮記』의「樂記」라고 밝혔다. 5)
한국, 중국, 일본은 19세기 중반부터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서양 문물을 주체적으로 수용했고,「樂舞」와「舞」란 단어밖에 없어 댄스를 무도로 번역했다.
송수남(宋壽南)의『韓國舞踊史』에 의하면 1900년부터 무도란 호칭을 사용했다.
1923년 8월 12일자『東亞日報』는 학교무도- 그의 해부와 체육상 가치란 논설을 통해
무도의 개념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6)
“전략… 원래 수무족도 하여서 어찌할 줄 모르는 감정의 발표가 무도이므로
발 디디는 것과 손 놀리는 법은 두 가지가 다 무도의 생명이다.… 후략”
무도는 춤의 멋과 흥, 아름다움을 적절히 표현한 명칭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과 함께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무도라고 하면 사교댄스로만 인식되어 왔다.
2. 접근방법
가. 역사의식
역사는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과정을 기술하고, 역사학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사건들의 인과관계와 상호관련성을 증거와 사료를 통해 해석한다.
사료의 탐사, 수집, 정리, 음미, 비판이 중요하고, 역사지식은 고정불변이 아니라
자료와 증거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역사가는 사관(史觀)에 따라 시대적,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사실을 선택하여 연구할 수 있지만,
사관 역시 시대의 변천에 따라 바뀐다.
대한민국은 1945년 광복 이후 일제 식민사관을 파괴하고, 한국사의 특수성과 세계사의
보편성을 조화시키기 위해 역사의식에서 주체성과 도덕성을 강조하고 있다.
나. 시대 구분법
역사기술에서 시대구분법은 역사를 이해하는 척도이며, 역사의식의 발로이다.
한국통사의 시대구분은 학자마다 다르다.
시간의 원근, 사회의 발전단계, 민족의 성장과정, 지배세력의 변화 등을 기준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고등학교 교과서는 거의 원시사회, 고대사회, 봉건사회,
근대사회라는 사회의 발전단계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노태돈․노명호․한영우․권태억․서중석의『시민을 위한 한국역사』(1997)는 왕조교체에 따른
사회발전의 의미를 강조, 삼국시대를 고대, 고려를 중세, 조선을 근세, 개항이후를 근대,
광복이후를 현대로 잡고 있다.
필자는 주체성과 도덕성의 역사의식을 강조하는 이 시대구분법을 따른다.
Ⅱ. 각론 - 시대별 약사
한국 무도사에 관한 선행연구에는 한국교원대학교 김해연의「한국댄스스포츠 변천사」(2001)와
상명대학교 장현진의「한국댄스스포츠의 시대별 단체활동에 관한 연구」(2006) 등이 있다.
이들은 사료가 부족한 실정에서도 선구적인 열정과 노력으로 석사학위 논문을 집필했다.
1. 대한제국 시대(1897 ~ 1910)
가. 손탁 호텔과 사교 댄스
이 논문들은 한국 무도사의 시원(始原)을 1890년으로 잡고 있다.
이 연대는 이순원 저『스포츠댄스』(1990)에 근거를 두고 있다.
"기록상 1890년 즈음 미국 공사 재임중인 이하영 씨가 보스턴 왈츠를 추었고,
귀국 후 서울 종로의 손탁 호텔에서 샴페인을 마시며 사교댄스를 추었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한국 무도사는 1890년부터 시작되고, 1897년 성립한 대한제국의 정부 대신 중
일부는 사교댄스를 추었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순원은 “기록상”이라고 했을 뿐 출처를 밝히지 안 했다.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당시 외교관이 댄스를 배웠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이하영은 1890년 주미 대리 공사 신분으로 보스턴 왈츠를 배웠다고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으니,
그의 행장(行狀)이나 문집(文集)에서 나온 자료일수도 있다.
반면에 손탁 호텔이 자리한 정동을 종로라고 표기한 것을 보면 구전(口傳)일 수 도 있다.
여하튼 1902년 서울 정동에 세운 "손탁 호텔에서 삼페인을 마시면서 사교댄스를 추었다"는
대목은 방증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손탁 호텔에서 무도회가 열린 기록이 불확실하고, 이하영이 댄스를 즐겼다면
당시의 여성 파트너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조선일보에 연재된 이규태의 『역사에세이』에 나오는 <독일여성 손탁 이야기>를 보아도
외국인의 무도회가 열린 곳은 손탁 호텔이 아니라 러시아 공사관이었다.
당시 사교계의 마돈나는 러시아 위베르 공사의 부인이었고,
손탁(본명 안토니에트 존다크)은 그의 여동생을 도우면서 호텔을 경영했다.
러시아 공사 내외는 1주일에 1회씩 공사관으로 외국인 내외를 초대해 파티를 베풀고
볼룸을 꾸며 무도회를 주최했던 것이다.
이 무도회에 대한제국의 대신이나 인사는 초청되지 안 했다.
한편으로 이하영(李夏榮)의 친일행위 여부도 확인해야 한다.
일본 정부에서 자작을 받았으면 친일파이고, 민족사학과 춘추필법은 친일파를
철저히 배제하기 때문이다.
매국노 이완용은 서예가 뛰어났지만, 그를 명필로 취급하지 않는다.
《주》이순원은 1990년 한국무도교육협회 대학위원회 위원장으로 텐 댄스 시범발표회를 가졌고,
이전부터 성신여자대학, 경기대학 등에서 스포츠댄스를 가르쳤다.
나. 청국 공관 무도회
송수남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 유입된 서양댄스는 1905년 청국 공관에서 개최된 무도회의
도무(蹈舞)라는 이름의 사교댄스였다. 7)
이 견해는 1905년(光武 9년) 11월 3일자『大韓每日申報』의 잡보(雜報)로 게재된
도무연회(蹈舞宴會)란 제목의 1단 짜리 기사를 근거로 추정한 것이다.
大韓每日申報 第六十九號 光武 九年 十一月 三日(金曜日). 蹈舞宴會
“본月 六日에 청公使 曾廣銓氏가 蹈舞會를 公館內에서 開催하고져 外國紳士를 宴待하기 爲하여
청帖을 發送하얏더라."
그런데, 청국 공사의 청첩대상은 외국신사였을 뿐 대한제국 정부의 대신이나 인사는 아니었다.
따라서「도무연회」기사는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
즉, 청국 공사가 외국신사만 초청한 댄스 파티였으므로 한국 최초의 무도회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2. 일제강점시대(1910 ~ 1945)
가. 1920 년대
1910년 국권상실 후 조선총독부는 무단통치를 실시했고, 1919년 3․1 민족해방운동에
충격을 받고는 문화통치를 표방했다.
『東亞日報』,『朝鮮日報』,『開闢』등 신문과 잡지가 발간되었으나 경제수탈과 억압은 여전했다.
(1) 해삼위 동포연예단 공연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러시아 극동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의 동포연예단이
모국을 방문하여 서양 댄스를 처음 선보였다.
제1회 연예단(학생 11명)은 1921년 4월 29일 서울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독무(獨舞)이지만
보헤미아의 폴카를 비롯하여 러시아, 스페인의 민속무용을 소개했다.
당시『東亞日報』는「海蔘威同胞演藝團」으로,『每日申報』는
「音樂과舞蹈大會」와「海蔘威音樂團 演奏曲目」등의 제목으로 소개했다.
제1회 학생 연예단의 공연이 성공하자 1922년에는 학생과 전문가 21명으로 구성된
연예단이 방문했다.
이 가운데 김동한은 연해주정부 현악대 감독이었다.
해삼위 동포 연예단은 1925년까지 서양 댄스와 러시아 민속 무용을 소개했고,
그 여파로 서양 댄스의 교육기관이 생겨났다.
(2) 서양 댄스 교육기관
(가) 예술학원
1920년 연극인 현철(玄哲, 1891-1965)이 학생들에게 연극과 무용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했다.
그런데, 1922년 동포연예단의 일원이었던 김동한이 러시아 유학에서 돌아와 무용부를 맡아
사교 댄스와 코팍 댄스(Hopak Dance)를 가르쳤다.
김운미(金雲美)의『한국교육무용사』에 의하면, 예술학원은 점차 조직력을 강화하여
러시아 무용교사를 직접 초빙할 정도였고, 1925년에는 전성기를 맞았다.
김동한은 문헌상 사교 댄스를 가르친 최초의 인사이다.
(나) 구미무도학관
조선인으로 교육무용을 전공한 이병삼(李丙三)은 1925년 서울과 평양에 구미무도학관을 설립했다.
이 학관의 교육과목은 민악무(民樂舞), 체육무(體育舞), 사교무(社交舞), 무대무(舞臺舞)였다.
1925. 9. 17 자『東亞日報』에 의하면 이병삼은 1923년 5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일본 도쿄(東京)의
청년회관체육부에서 체육무도를 수업하고 평양 숭실중학의 체조와 무도교사로 재직했다.
1925년 6월부터 8월까지 중국 하얼빈(哈爾賓)에서 러시아인 무도학교를 졸업하고 귀국즉시
학관을 설립했다.
이 구미무도학관은 한국교육무용의 발전에도 획기적 계기를 이루었다.
(다) 권번
기생조합인 권번(券番)은 1925년 이후 댄스교사를 초빙하여 사교 댄스를 가르쳤다.
『서울六百年史』는 일제강점기의 사교 댄스와 관련, 조원경(趙元庚)의『무용예술』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코팍 댄스와 사교춤은 화류계로 침투하여 각 권번에서 교습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만주에서 철도국에 다니던 윤국(본명 尹思錫), 김용범, 안세민, 지용 등이 지도했다.”
《주》조원경이 언급한 윤국 윤사석(尹思錫)의 기록은 윤풍(風) 윤은석(尹恩錫)의
오기(誤記)가 아닌가 싶다.
1901생인 윤은석은 예명이 풍(風, 바람), 본래 재인(才人)으로 일본 다마키신키치(玉置眞吉)에게
댄스를 배웠다. 그의 예명은 동료인 이서구(李瑞求)가 지어주었다.
(3) 딴스에 대한 비난
일제강점기에 댄스는 “딴스”라고 표기했다.
1920년대 이후 서울에서 유행하는 “딴스”에 대한 비판도 거세었다.
1924. 11. 20 자『每日新報』의 기사이다.
「新流行의 亡風 所謂 社交舞蹈」란 제목으로 배가 고파 쩔쩔매는 조선 놈들이
사교무도니 또는 무대 무도란 무엇이냐 면서 다음과 같이 힐책했다.
“이것이 유행이 되어서 배우러 다니는 도련님과 아가씨들도 있다.
일원 혹은 이원씩 내고 구경오는 숙녀 신사도 있다.
동무여! 우리는 매사를 떠들기만 하지 말고 먼저 생각을 하여 보자! - 일백의아(一白衣兒) ”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9년에는 일본인들이 서울에 댄스홀을 허가해달라고 총독부에 청원했다.
1929. 3. 11자『朝鮮日報』에 의하면, “그 명칭을 소시얼 구락부로 하고…” 청원했지만
총독부는 이를 불허했다.
나. 1930 연대
(1) 댄스홀 허가청원
월간『삼천리』1937년 1월 호는 일제강점기시대 “서울에 댄스홀을 허하라”는
청원서 내용을 전문 게재했다.
미하시(三橋) 경무국장에게 보낸 청원서는 아시아의 문명도시에는 다 있는 댄스홀을
유독 조선에만 허락하지 않는 사실을 통탄하면서 8명의 연예인이 연명으로 제출했다.
이들은 당대의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이었다.
대일본 레코드회사 문예부장 이서구(李瑞求), 긱다점 ‘비너스’ 마담 복혜숙(卜惠淑),
조선 권번 기생 오은희(吳銀姬), 한성 권번 기생 최옥진(崔玉眞), 종로 권번 기생 박금도(朴錦桃),
바 ‘멕시코’ 여급 김은희(金銀姬), 영화 여우(女優) 오도실(吳桃實), 동양극장 여우(女優) 최선화
(崔仙花) 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댄스홀을 계속 불허했다.
그러나 댄스는 카페나 바에서 유행했다.
다. 1940 연대 전반
(1) 카페의 폐쇄
일제는 1940년 조선어말살정책으로『朝鮮日報』,『東亞日報』를 폐간시키고,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했다.
이에 조선의 연예인들을 침략전쟁의 선전도구로 이용하고,
최승희, 조택원 같은 근대무용가들도 친일의 길을 걷게 했다.
1941년부터는 댄스를 추던 카페마저 폐쇄했다.
3. 미군정 시대(1945 ~ 1948)
가. 1940년대 후반
(1) 최초의 카바레
1945년 8월 15일 조국의 광복을 전후하여 북위 38도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8월 7일부터 진주했고,
이남에는 미군이 9월 8일 인천을 거쳐 서울로 진주했다.
미군정 시대에 지터버그가 유행했고, 미군을 상대로 하는 카바레들이 생겨났다.
『서울六百年史』에 의하면
서울 회현동 소재 현재의 신세계백화점 건물에 최초의 카바레가 문을 열었다.
이 귀속(歸屬) 건물은 광복 이전에 일본인이 소유한 미쓰코시(三越) 백화점이었다.
이어 서울시내에는 카바레가 계속 생겼다.
4. 대한민국정부 시대(1948 ~ 현재)
가. 1950 년대
1950년 6월 25일 북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될 때까지 전쟁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민을 위한 한국역사』에 의하면 전쟁으로 말미암아
이산가족, 고아, 전쟁미망인이 급증하였고 댄스가 유행했다.
(1) 이북 출신 무도인의 남하
1951년 1․4 후퇴 시 이북출신 무도인이 대거 남하했다.
이재영(李在英), 장상일(張商一), 배영(裵英), 장운용(張雲龍), 박의범(朴義範),
박호진(朴好珍), 김태룡(金泰龍), 김경필(金景弼) 등이다.
한국전쟁 이전의 댄스교사는 서울출신의 윤은석(尹恩錫), 대구출신의 김종기(金鍾麒),
부산의 김인준(金仁準) 등이 있었다.
한편, 해주 출신의 김익수(金益洙)는 한국전쟁기간 중에 댄스교사로 전업했다.
(2) 경남사교무도교사협회
1953년 9월 18일 부산에서 김경필, 백일태(白一台), 권재일(權在一) 등은
경남사교무도교사협회를 설립했다.
무도인의 집회․결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이 협회의 당시 회장 김경필은 1954년 10월 동래의 승리 댄스 홀에서 경기대회를 개최하고
송주섭 커플을 챔피언으로 선발했다고 최근 강조하는데, 몇 종목인지는 언급이 없다.
(3) 소설『자유부인』공방 사건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954년 1월부터 8월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된 정비석(鄭飛石)의 소설
『자유부인』은 한국전쟁 직후의 퇴폐풍조와 사회상 등을 비판한 풍자소설이었다.
그런데, 소설 속의 주인공인 대학국문학과교수인 장태연은 미군 부대에 다니는 군속 신분의
은영에게 매혹되고, 그의 아내 오선영은 대학생 품에 안겨 춤을 추는 내용이 문제였다.
당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황산덕(黃山德) 교수는
“대학교수를 양공주에 굴복시키고, 대학교수부인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대학신문』을 통해 비판하면서 작가와의 공방전을 벌였다.
이 논쟁으로 댄스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부각되었다.
소설『자유부인』은 1955년 단행본으로 발간되고 영화화되었다.
(4) 세칭『박인수』사건
해군헌병대위를 사칭한 박인수는 1954년 4월부터 1955년 5월까지 1년여 동안
70명의 여성을 카바레에서 만나 혼인을 빙자하여 육체관계를 가진 혐의로 기소되었다.
당시 신문은 1955년 5월 31일 박인수가 검거될 때부터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서울지방법원(판사 권순영)은 1956년 7월 22일
“법이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다.”면서
혼인빙자간음 혐의는 무죄를, 공무원 사칭만 벌금형(2만환)을 선고했다.
검찰은 이에 항고했고, 서울고등법원은 혼인빙자간음혐의와 공무원사칭혐의를
모두 인정하여 징역형(1년)을 선고했다.
박인수는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이 사건은 성도덕의 문란한 단면을 노출했고,
그 이후 카바레라고 하면「죄악의 소굴(Dens of Iniquity)」로 인식하게 되었다.
《주》 볼룸 댄스와 관련하여「죄악의 소굴」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영국댄스산업체인 메카(Mecca)의 공동대표를 지낸 에릭 몰리(Eric Morley)였다.
그는 1968년 프랭크와 페기 스펜서(Frank and Peggy Spencer)가 함께 쓴
『컴 댄싱(Come Dancing)』의 머리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반 대중은 소위 궁전 무도가 영국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의 흥미와
‘죄악의 소굴’로 여기던 것을 어떤 계층이나 유형의 사람도 입장하는
아름답고 호화로운 무도장으로 바꾼 배후의 인물을 발견할 것이다.”
(General public will also find interest in how the so-called 'palais dancing'
started in this country and the man behind it who turned what were looked
upon as 'dens of iniquity' into beautiful, sumptuous ballrooms fit for any class
and type of person to enter.- Eric Morley)
(5) 서울무도교사협회 설립
1958년 4월 서울의 무도교사들은 낙원동 소재 윤은석의 스튜디오에서
서울무도교사협회를 설립했다.
회장은 윤은석, 부회장은 이재영, 장상일 이었다.
당시 교사들은 주로 일본의 다마키신키치(玉置眞吉), 나가요시가게(永吉影)의 책으로 가르쳤다.
그래서 북 댄스(Book Dance)란 말이 나왔다.
1958년 일본에서 귀국한 안무중(安茂中)에 의하면 일부 교사들은 이론에 치우쳤고 실기는 떨어졌다.
《주》안무중은 마산 출신으로 1952년 일본예술대학으로 유학,
1956년 일본학생무도경기대회에서 우승했고 나가요시가게로부터 개인지도를 받았다.
(6) 제1회 전국무도경기선수권대회
1959년 9월 25일(금요일)자『한국일보』는 4면에
「제1회 전국무도댄스경기선수권대회」의 안내기사를 제목 2단, 본문 1단으로 게재했다.
全國舞蹈땐스競技大會- 韓國文化宣傳協會主催․本社後援
韓國文化宣傳協會에서는 한국일보社 後援으로「第一회 全國舞蹈댄스 競技 選手權大會」를
來 二十六, 七 兩日 間에 걸쳐 下午 六時 三十分부터 獎忠壇所在 陸軍 體育館에서 開催한다.
이 대회에는 서울, 대구, 부산 등지에서 선수들이 대거 참가했고, 심사위원만 30여명이었다.
음악은 김광석 경음악단이 연주했고, 체육관에는 지붕이 없고, 댄스 마루는 별도로 깔았다.
우승은 이종군 커플, 준우승은 안무중 커플, 3위는 임진 커플, 4위는 최경호 커플이 차지했다.
그러나 주최자인 한국문화선전협회(韓國文化宣傳協會)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다만, 1959년은 1년 내내 재일 교포 북송반대운동이 벌어졌고,
자유당정권은 1960년의 총선 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전국무도경기대회는 계획되었고,
대회는 흥행 면에서도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행사 직전인 9월 17일 불어닥친 사라호 태풍의 피해로 인해
댄스 행사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안 했다.
나. 1960 년대
(1) 5․16의 철퇴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일어난 4․19 학생혁명에 의해 자유당의 이승만 정권은 무너지고
7․29 총선을 통해 장면 민주당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부정권은 사회악을 일소한다면서
무도계에 철퇴를 내렸다.
무도인을 포함하여 7명을 삼청교육대로 끌어간 칠공자(七公子) 사건이 발생했고,
이후 무도교습은 지하로 잠복했으며 무도인은 최대의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다.
(2) 신흥무용학원의 무도 교습
윤은석은 현재 광화문 소재 세광 빌딩 4층 자리에 신흥무용학원을 차리고
전통무용과 무도를 가르쳤다.
당시 이 학원에는 전통무용의 전황(全黃), 조흥동(趙興東), 오미자(吳美子) 등이 출입했다.
전황은 현재 재즈댄서인 전미례의 부친이고, 조흥동은 한국무용협회의 이사장을 지냈고,
오미자는 살풀이로 명무(名舞)가 되었다.
(3) 대한무도예술협회 설립
김익수는 대한무도예술협회를 설립하고, 1969년 1월 15일자로 문화공보부에 사회 단체로 등록했다. 그리고 동년 6월 일본의 전 챔피언 이시하라이치조(石原市城) 커플을 초청하여
서울 낙원동 123 회관에서 전국무도선수권 대회를 개최했다.
우승은 이상훈․이미원 커플, 준우승은 이상표․이백합자 커플이었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심사를 전담한 이시하라 부부는 텐 댄스 시범으로
영국식 댄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주》1915년 생인 김익수(아호 常原)는
해주중학과 일본 무사시노(武藏野)음대를 졸업,
경기중학 음악교사로 재직 중 1951년 부산 피난시절에 댄스교사가 되었다.
김익수는 불의의 사건으로 1970년 회장직을 대구출신 김삼도에게 넘겼다.
1980년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다. 1970 년대
(1) 한국무도교육협회 설립
김종기, 이재영, 배영 등은 한국무도교육협회를 설립, 성균관대학교 수학과 교수인 김성수를 회장,
김종기를 이사장, 윤은석을 감사로 선출하고, 문교부에 법인허가를 신청했다.
1970년 3월 7일 최초로 사단법인 허가가 나왔다.
《주1》1924년 생인 김종기는 1943년 대구사범을 졸업, 평북 철산국민학교와 서울 장충국민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1949년 서울대음대에 진학하고 댄스교사를 시작했다.
(2) 상원무용학원 무도과
김익수는 1970년 서울 신설동(현재 전철역부근)에 상원무용학원을 설립하고
무도만을 전문적으로 가르쳤다.
학원 측은 서울특별시교육청에서 무용학원 설립 허가를 신청할 때
무도과를 명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73년 4월 경향신문 기자의 확인 질문에 교육청 관계자는
무도교육을 공식적으로 허가한 사실이 없다고 말했다.
《주》 당시 상원 무용학원의 댄스 교사였던 정응모(鄭應模))에 의하면
학원은 정식 허가를 받은 것이 사실이므로 경찰의 단속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3) 라틴댄스의 활성화
1971년 3월 10일 대한무도예술협회 제3대 회장으로 취임한 천정태(千呈泰)는
김점병, 강보일, 김영준, 박창백 등과 함께 경기대회를 활성화하기 위해
일본 아키야마나오부미(秋山直文) 커플 등을 초청하여 시범을 보였다.
특히 1973년 하와이에서 활약중인 원인화의 초청시범은 라틴아메리칸 댄스를 활성화시켰다.
원인화는 1974년 10월 대한무도예술협회가 주최한 전국무도경기대회(라틴 쿼터)에서
라틴아메리칸 댄스부문을 심사했다.
룸바와 파소도블레 2 종목에 6개 커플이 참가한 경기에서
박영택․정지영 커플, 박효․임성실 커플이 공동 우승했다.
《주》원인화는 경기도 송탄의 댄스교사 출신으로
1969년 미국 하와이의 아더 머레이 댄스 스튜디오에 유학, 1973년 귀국했었다.
미국 시민권자인 원인화는 80년대 미국에서 타계했다.
(4) ICBD 가맹 공방
1971년 부산에서 대한민국 표준무도협회가 설립되고 회장에 김용주가 취임했다.
표준무도협회는 매년 한․일 친선무도회를 개최하고,
1973년 미국에 선수(서봉수 커플)를 파견, 국제활동을 강화했다.
그리고 1974년 2월 ICBD 준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러나 대한무도예술협회는 “부산시지부 김용주가 ICBD에 KCBD로 변경,
준회원국 대표로 오(誤)가입한 사실이 드러났다”면서 형사 고발 조치했다.
반면에 한국무도교육협회는 1974년 6월 ICAD에 가입하고,
75년 10월과 76년 3월 서울 무교동 센트럴 호텔에서 무도발표회를 가졌다.
당시 아마추어발표자는 홍종화, 상유숙, 유우봉, 박계순, 박성식, 유덕희, 이영환,
장보성, 이종무 이었다.
그리고 한국무도교육협회는 1976년 6월 ICBD에 가입했다.
(5) MBC 체육관대회
대한무도예술협회는 매년 경기 대회를 개최했으나 장소는 거의 카바레였다.
천정태 회장은 1977년 세계무도선수권대회(토쿄)에 파견할 한국대표선수
선발전의 장소로 체육관을 희망했고, 경향신문기자였던 유우봉에게 부탁하여
문화방송(MBC) 체육관을 빌리는데 성공했다.
《주》필자는 서울 용산 삼각지 소재 대한무도예술협회 사무실에서
천정태 회장으로부터 받은 상임고문 위촉장을 들고 경향신문을 찾아갔다.
당시 경향신문과 문화방송은 통합상태였는데,
동료기자들이 체육관 대관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이 대회의 우승자는 박효․김숙희 커플(모던 부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세계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ICBD 가입권을 행사한 한국무도교육협회 김종기 회장이 김성수․이순례 커플을
한국대표선수로 지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커플도 비자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세계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라. 1980 년대
(1) 동아문화 센터 강좌
1981년 10월 1일 동아일보문화센터는 댄스프로그램을 개설했고,
초대강사는 안성묵(초급반), 박효(중급반), 배영(취미반) 이었다.
이후 중앙일보를 비롯하여 한국일보, KBS, MBC 등
언론기관과 백화점의 문화센터는 댄스강좌를 계속 개설했다.
안성묵에 의하면 동아문화센터의 댄스강좌를 개설하기까지에는
동아일보사 설립자의 자제인 전 유럽특파원 김상석의 도움이 컸다.
《주》안성묵은 1959년 동국대학교 2학년 때부터 댄스를 배웠고,
1963년 육군에서 의가사 제대후 신흥무용학원에서 윤은석과 함께
댄스교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 올림픽 유스 캠프 운영
한국무도교육협회는 1988년 9월 25일 서울마포소재 가든 호텔에서
올림픽 유스 캠프(Youth Camp)의 일환으로 국제초청경기를 개최했다.
참가팀은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일본, 한국이었다.
정부의 북방외교전략의 일환으로 소련 팀도 초청했으나 불참했고,
체코슬로바키아 팀이 모던과 라틴을 모두 우승했다.
(3) 무도교습소 양성화 청원
정부는 1989년 체육시설의 설치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의 제정을 추진했다.
이에 앞서 1987년 무도교습소 양성화 추진위원회(위원장 천정태)는 무도인 1,500 여명의
서명 날인을 받아 국회에 청원서,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탄원서를 제출한 상태였다.
그 이후 체육시설 관련 법령의 제정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자 무도인들은 무도학원과 무도장을
체육시설에 포함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정부관계자는 양대 무도단체의 통합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1990년 체육시설 설치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은 제정되었고,
무도학원과 무도장은 체육시설로 포함되지 못했다.
《주》당시 체육부 사무관이던 이시우(李時雨)에 의하면
한국무도교육협회와 대한무도예술협회의 통합은 어려웠고,
그런 상태로 무도학원과 무도장의 체육시설 화는 불가능했다.
마. 1990 년대
(1) ICBD 회원단체 변경
무도교습소 양성화 추진위원회 측은 정부당국의 처사와
유일한 사단법인 한국무도교육협회의 미온적인 대처에 불만이 컸고,
ICAD와 ICBD에 모두 가입한 김종기 회장을 공격했다.
그리고 ICBD에 아마추어 단체의 장이 프로페셔널 단체의 장을 겸임할 수 있느냐는
질의와 함께 한국문제를 조속히 해결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ICBD는 한국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당시 ICBD 부회장 고지마데쓰지(小島鐵治)와
아시아태평양지역 회장인 조 러브스(Joe Loves)를 파견했다.
이들은 I990년 2월 3일과 4일 조선호텔 연회장에서 이해당사자인 김종기 회장, 천정태 회장,
김용주 회장 등 2백여 명의 무도인이 참가한 가운데 실태를 파악했다.
《주》이 회의에서 김종기 회장은 ICAD 가맹 대표를 유우봉 이라고 밝혔다.
동년 2월 1일 한국무도교육협회 아마추어 회원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아마추어스포츠댄스위원회(KASDC)는 동년 2월 15일 ICAD에 대표자 변경을 신고했다.
ICBD는 동년 3월 4일 고지마데쓰지 부회장을 한국에 다시 보내
무도인 140명이 참가한 가운데 투표로서 한국대표자를 결정했다.
새로 조직된 한국무도평의회(회장 천정태)는
1990년 5월 29일 ICBD 총회에 정식회원으로 가맹했다.
《주》1925년 생인 천정태(아호 榮雲)는
1960년 경북도 경찰국을 그만둔 후 댄스 교사를 시작,
1971년 대한무도예술협회 제 3대 회장을 맡았었고, 2006년 타계했다.
(2) 풍속 영업 규제에 관한 법령
정부는 1991년 3월 7일 풍속영업규제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종전처럼 사교댄스를 가르치면 경범죄로 처벌받지 않고,
무도학원과 무도장은 경찰서장에게 설립을 신고하게 되었다.
동년 3월 28일 시행령, 동년 7월 27일 시행규칙이 제정되어
한국무도 계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
정부는 1999년 7월 1일 체육시설의 설치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을 개정,
무도학원과 무도장을 구청장․시장․군수에 신고하도록 바꾸었다.
그러나 다른 내용은 여전히 풍속영업규제 법령의 적용을 받고 있다.
(3) 제1회 문화체육부장관 배
1994년 설립된 한국무도 총연합회(회장 박동일)는 동년 12월 4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문화체육부 장관 배 전국무도선수권경기대회를 개최했다.
모던 부문에서 우승한 한용수․최영자 커플은 대상(大賞)의 장관 배를 차지했고,
라틴 부문은 이만호․성수정 커플이 우승했다.
(4) IDSF 아시아태평양 선수권 대회
한국아마추어스포츠댄스위원회(KASDC)는 1996년 11월 2일 서울 KBS 88체육관에서
IDSF제3회 아시아태평양지역 댄스스포츠선수권대회를 개최하고
아시아댄스스포츠연맹의 창설을 지원했다.
대회장은 유우봉, 집행위원장은 박계순 이었다.
중국, 일본, 대만, 홍콩, 필리핀, 싱가포르, 타이랜드, 한국, 호주, 뉴질랜드 등
10 개국의 대표 선수가 스탠더드와 라틴 아메리칸 부문 모두 40 커플이 참가했다.
한국선수는 스탠더드부문의 옥수두․신옥자 커플, 김효․김임희 커플,
라틴아메리칸 부문에 박영진․이윤영 커플, 성기대․주영숙 커플이었다.
심사위원은 7개국에서 초청했는데 한국 측은 반옥희(스탠더드)와 이만호(라틴)가 참가했다.
(5) 올림픽운동의 활성화
KASDC는 1997년 7월 5일 서울총회에서
조직체제를 바꾸어 한국댄스스포츠연맹(KDSF)을 설립했다.
당시 임원은 회장 유우봉, 부회장 김정일, 사무총장 옥수두, 교육이사 박계순,
연수이사 공미애 등이었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댄스스포츠는 시범종목이었으나
KDSF는 대한체육회에 가입하지 못한 상태라 선수를 파견하지 못하고,
옥수두 사무총장만 심사위원으로 파견했다.
이웃 일본 역시 같은 이유로 선수를 보내지 못했다.
그 이후 KDSF는 올림픽 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한국댄스스포츠발전 세미나」를
1998년(제1회), 1999년(제2회), 2000년(제3회) 계속 개최했다.
한편, 프로페셔널을 허용하는 IDSF의 정책에 따라 KDSF는 김재일, 반옥희, 안상석,
박양례, 김호주 등 프로페셔널 무도 인을 임원으로 영입했다.
(6) 제4회 아시아 댄스스포츠 선수권대회
KDSF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댄스스포츠를 정식 종목으로 채택시키려는
IDSF의 전략에 힘입어 1999년 10월 14일 제4회 IDSF 아시아 댄스스포츠선수권 대회를
대전에서 개최했다.
이 대회(대회장 유우봉)는 상임이사 안상석에게 재정 책임을 맡겨서 치렀고,
안상석은 대전광역시장 배 전국댄스스포츠선수권대회 대회장을 겸하여 대회를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7) 무도단체간의 경쟁
한국무도교육협회는 1993년 김종기 회장의 타계로 인해 김성수가 제 7대 회장에 취임했다.
1996년 한국무도강사협회(회장 신길자), 1997년 한국댄스스포츠 교사협회(회장 김종문)가
설립되었고,
1998년 한국댄스스포츠연합회(회장 박효), 한국댄스스포츠진흥회(회장 박계순)가 설립되어
단체간에 경쟁을 벌였다.
한편, 한국무도교육협회는 1998년 제 8대 회장에 박영택이 취임했고,
한국무도평의회는 1999년 한국댄스스포츠평의회로 명칭을 바꾸고 천종순 회장체제로 출범했다.
천정태 회장은 명예회장으로서 한국학원연합회 회장직에 전념했다.
바. 2000 년대
(1) 3개 단체의 공동세미나
2000년 10월 15일 서울 소재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강당에서 한국댄스스포츠의 진흥방안을
수립하기 위해 한국댄스스포츠연맹, 한국무도교육협회, 한국댄스스포츠연합회가
공동으로 세미나를 주최했다.
이 세미나는 단체협의회 사무총장 단의 김재일, 배명관, 김민의 경과보고와
회장단의 유우봉, 박영택, 박효의 주제발표에 이어 한국무도교사협회 김종문 회장의 발표가 있었다.
(2) 무도단체의 사단법인화
정부의 무도단체 활성화방침에 따라 2001년부터 사단법인이 대거 설립되고,
기존 단체들도 사단법인으로 전환했다.
2001년 21세기 댄스스포츠육성연맹(회장 안상석), 대한댄스스포츠 총연합회(총재 신길자),
한국댄스스포츠경기연맹(회장 강귀찬), 대한댄스스포츠연맹(회장 박순희),
국제댄스스포츠협회(회장 백종렬), 대한댄스스포츠진흥회(회장 이선우)가 설립되었다.
2002년에는 대한댄스스포츠협회(회장 이도웅), 아메리칸 스포츠댄스협회(회장 홍기주),
한국댄스스포츠지도자협회(회장 서봉수), 한국휠체어댄스스포츠연맹(회장 이춘식)이 설립되었다.
한국무도교육협회는 제 9대 회장으로 송문수가 취임했다.
2003년에는 한국청소년댄스스포츠 총연합회(회장 김정곤),
한국프로페셔널댄스스포츠협회(회장 박은미)가 설립되었다.
한편, ISTD 한국본부연수원(대표 이도웅)은
2001년 ISTD의 교재『라틴 아메리칸 댄스』와『볼룸 테크닉』을
정식계약을 통해 최초로 번역했다.
(3) 대한체육회 가맹
한국댄스스포츠연맹(KDSF)은 2001년 7월 1일 정기총회에서 제2대 회장으로 유승원을 선출했다.
유승원 회장은 2002년 IDSF서울오픈(Seoul Open)을 유치하여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잘 치르고,
한국무도발전을 위해 중대 발표를 했다.
즉, 대한체육회 가입을 위해 무도단체의 통합을 전제로 IDSF 회원단체인 KDSF의 회장직을
사퇴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2003년 3월 14일 청주에서 열린 임시총회는 찬반양론 끝에 유승원 회장의 사의를 수용하고
한국댄스스포츠평의회 회장 천종순을 제3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런데, 대한체육회 가입을 목표로 동년 3월에 설립한 대한댄스스포츠경기연맹(회장 권윤방)은
동년 9월 IDSF아시아댄스스포츠선수권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동년 12월 22일 대한체육회에 준회원단체로 가입했다.
마침내 한국무도발전의 획기적인 전환을 이룩한 것이다.
Ⅲ. 연표
1897년 대한제국 성립
1902년 서울 정동에 손탁 호텔 개업
1905년 청국 공관 무도회
1910년 대한제국 국권상실
1921년 제1차 블라디보스토크 동포 연예단 모국공연
1922년 예술학원 김동한, 사교 댄스 교습
1925년 구미무도학관 이병삼, 사교 댄스 교습
1926년 권번, 사교댄스 교습
1937년 이서구 등 연예인 8명 댄스홀 허가청원
1945년 조국 광복, 미군정 실시, 서울 회현동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미군상대의 댄스홀 개업
1948년 대한민국 성립
1950년 한국전쟁 발생
1951년 이북출신 무도인 남하
1953년 한국전쟁 휴전성립, 경남사교무도교사협회 설립
1954년 소설『자유부인』공방 사건
1555년 박인수 사건
1958년 서울무도교사협회 설립
1959년 제1회 전국무도댄스경기선수권대회(서울 육군체육관)
1960년 4․19 학생혁명
1961년 5․16 군부 쿠테타, 무도 계에 철퇴
1963년 윤은석, 신흥 무용학원에서 무도 교습
1969년 대한무도예술협회 설립(회장 김익수), 전국무도선수권대회(서울 123 회관)
1970년 사단법인 한국무도교육협회 설립(회장 김성수, 이사장 김종기)
대한무도예술협회 제2대 김삼도 회장 취임
상원무용학원(원장 김익수) 무도과 설치
1971년 대한무도예술협회 제3대 천정태 회장 취임
1973년 원인화 라틴 댄스 시범
1974년 대한민국 표준무도협회(회장 김용주), ICBD 가입
대한무도예술협회, 김용주 회장을 형사 고발
한국무도교육협회, ICAD 가입
1977년 세계선수권대회 파견 한국대표선수 선발전(MBC 체육관)
1981년 동아문화 센터, 댄스강좌 개설
1986년 한국무도교육협회(회장 김종기), ICBD 가입
1987년 무도교습소의 양성화 청원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스 캠프 운영
1990년 한국아마추어스포츠댄스위원회(회장 유우봉), ICAD 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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